<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 남근석 기행>원주 강원감영
6백년 묵은 느티나무 둥치에 남근목이 화제가 되고 있다. 남근목은 강원도 원주도심 한 가운데인 조선시대 도지사격인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강원감영이 있던 곳이다.
이 남근은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 뒷마당 느티나무 기둥에 돌출돼 있는데, 두 갈래로 갈라지는 굵은 쪽 나무 가지에 높이 1.5m, 둘레 약 50cm로 귀두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더구나 남근이 불끈 용을 쓰고 있는 1m 위에는 여근목이 거꾸로 서 있어 묘한 느낌이 든다.
오래된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줄기에는 알통모양의 형상이 돌출된 곳이 더러 있지만 남근목 처럼 리얼한 형태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감영 관리인에 따르면 “10년전 만 해도 남근목을 만지면 아들을 얻는다는 소문 때문에 밤중에 부녀자들이 몰래 들어와 치성을 드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했다. 아들나무로 부르기도 한 이 남근목에는 요즘도 가끔 무속인들이 찾아오지만 치성행위는 단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남자아이를 선호했던 조선시대 때부터 치성장소로 이곳 관청문을 개방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남근은 숱한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게 달아 있다.
원주 강원감영은 태조 이성계가 1395년 건립해 조선말까지 5백여 년 강원도의 중심무대였다. 영조 35년(1795)에는 27동의 건물이 있었으며, 그 후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증축을 통해 고종 때는 43동의 건물과 4백여명의 관리가 근무했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였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여러 번 수난을 겪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화재로 전소됐다가 80년에 걸쳐 다시 세웠지만,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과 담장이 훼손되고 관풍각이 있던 큰 연못마저 메워지는 일이 있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한 후 강원감영도 퇴락의 길로 들어선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근대화를 목적으로 그들은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지방조직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강원도는 춘천관찰부와 강릉관찰부로 분할되고, 원주는 충주관찰부 산하로 편입됐다.
한때 위풍당당했던 강원감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강원감영에는 당시의 건물인 선화당과 청운당, 포정루가 남아있으며, 2000년 발굴조사결과 중삼문지, 내삼문지, 공방고지, 책방고, 보도, 담장지, 행각지 등의 유구흔적도 남아있다. 특히 감영 이전, 고려시대 원주목의 관아가 있던 건물지가 지하에 보존돼 있어 우리나라 관아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강원감영은 궁궐처럼 '삼문삼조'의 원칙에 따라 지어졌다. 포정루, 중삼문, 내삼문을 거쳐야 본관건물인 선화당에 들어갈 수 있다. 원주시는 남아있는 감영 옛 터에 2000년부터 복원을 하고 있으며, 국내서 강원감영만 유일하게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나이 6백년 된 느티나무에 붙어있는 남근목은 강원감영 후원공간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때 경회루 같은 관풍각도 인공연못도 있었는데 복원계획에 포함됐다. 당시의 고위관리들은 연회를 즐기면서 그윽한 흥취에 취해 남근을 바라보며 어떤 충동을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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