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세력 향한 MB의 승부수 "나는 원칙을 지켰다"
남북 관계 미국 중국 외교 비사 공개 현정부에 부담
전문가들 "국정조사 출석 요구에 회고록으로 맞불"
이명박 전 대통령이 29일 자신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을 통해 지난 2011년 남북정상회담 과정을 둘러싼 뒷이야기를 공개했지만, 그 시기를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면서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는 유년시절부터 성장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담겨져 있다. 이어 현대건설 재직 당시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과의 인연, 정치계 입문, 제18대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담았다. 대통령 임기동안 발생한 ‘촛불 파동’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서술했다.
특히 지난 2011년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북한과 정반대의 내용을 담았다. ‘남한이 돈봉투를 제시하면 정상회담을 애걸했다’는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오히려 ‘북한이 수차례 정상회담을 갖자며 대가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2011년 6월 1일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과의 인터뷰에서 5월 9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남북 비밀접촉의 내용을 공개하며 “제발 딱한 사정을 들어달라고 구걸했다. 돈봉투까지 거리낌 없이 내놓고 그 누구를 유혹하려고 했다”고 밝혔다.
국방위 대변인은 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해서도 “남측 정부는 지난 4월 비밀접촉을 제안하면서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해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으니 제발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을 갖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는 북한이 먼저 나서서 남북정상회담을 수차례 요구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를 요구해 이명박 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북한의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서술돼 있다.
북한은 지난 2009년 8월 23일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단을 파견했을 당시 처음으로 접촉을 요구했다. 당시 조문단장이었던 김기남 북한 노동당 비서는 청와대에서 이 전 대통령과 만나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을 가질 의사가 있다고 전했지만 이 전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이 과거처럼 정작 중요한 문제는 언급하지 못하면서 대북지원 논의만 하는 것이라면 회담이 필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닷새 뒤인 8월 28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통일부 장관 앞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쌀, 비료 등 경제지원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해 진전이 없었다.
이듬해 10월에는 싱가포르에서 임태희 당시 노동부장관이 나서 남북접촉이 이뤄졌고 북한은 한달 뒤 개성에서 이어진 통일부-통전부 실무회담에서 “두 사람이 합의한 내용”이라며 대북지원 내용이 담긴 3장짜리 합의서를 들고 나와 이행을 요구했지만 임 장관은 “논의 내용을 적었던 것에 불과하며 합의문이 아니다”라고 부인해 결렬됐다.
북한은 천안함 침몰에 따른 5·24 조치 발표 한달 뒤인 6월 국가안전보위부 고위급 인사 명의로 ‘국가정보원과 접촉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이후 7월에 국정원 고위인사가 방북해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를 요구했다. 북한은 “동족으로서는 유감이라 생각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히겠다며, 쌀 50만톤을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다.
같은 해 12월 5일 대좌 1명, 상좌 1명과 통신원 2명 등 북측 인사가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해 이 전 대통령을 예방하려 했지만 별도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2011년 초 미국 뉴욕에서 유엔주재 북한대사와 외교 채널 차원에서의 접촉, 5월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 정부 차원의 접촉이 있었지만 천안함 사과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를 두고 “그동안 우리는 이명박 정부가 돈봉투를 들고 갔다가 무안을 당한 것만 알고 있었는데, 회고록을 통해 제대로 했다는 게 알려졌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비판적인 여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최근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 이후 경색된 남북관계가 조금씩 해소될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 것을 두고 “왜 하필 이 시점에...”라는 의문표가 달리고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30일 ‘데일리안’과의 통화에서 “이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지금 현직에 관계자들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드물다”며 “남북대화의 비화를 공개하는 것은 사실상 남북대화를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는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한의 실상을 밝히는 것은 좋겠지만 향후 남북대화에 있어서는 과연 적절했는가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어느 정도의 지켜야 될 선이 있는 데 남북대화를 이어나가는 데는 당분간 껄끄러울 것 같다”고 전망했다.
또 이번 회고록 내용은 앞으로 우리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북한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산가족상봉, 남북고위급회담, 더 나아가 남북정상회담 등 북한과의 대화 고리가 발생할 때마다 ‘퍼주기의 대가’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은 “회고록이 나오면서 이 전 대통령 본인의 책임은 많이 덜었을지 모르지만 민감한 내용까지 털어놓은 게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면서 “전직 대통령이라면 더더욱 토시 하나하나가 미칠 파장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국익보다는 본인의 책을 더 많이 생각한 것 같다”고 비판했다.
김미현 알앤서치 소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하게 되면 국민들은 ‘얼마를 줬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며 “최근 남북정상회담 분위기 조성은 지지율 하락으로 국정 동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박 대통령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차원일 수도 있는데, 완전 발목을 잡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에서 진행 중인 자원외교 국정조사도 회고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비록 국정조사가 증인채택 문제를 두고 여야 이견으로 인해 여전히 출발선에서 제자리걸음 상태이지만 새누리당이 국정조사를 받아준 것 자체만으로도 이 전 대통령의 심기가 불편해졌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실제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해외 자원개발 총괄 지휘는 한승수 전 국무총리가 맡았고, 10년에서 30년이 지나야 그 성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퇴임한 지 2년도 채 안된 상황에서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노무현 정부보다 더 잘했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사실상 자원외교는 문제가 없고, 현재 진행 중인 국정조사도 부당하다는 의미다.
김 소장은 “이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자원외교를 덮고, 동시에 진보정권과의 차별화를 내세우면서 보수세력의 결집을 노리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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