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잃었던 축구대표팀이 뚜렷한 목표 설정을 하면서 대한축구협회 이용수 기술위원장의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
그가 표류하던 한국 축구를 위해 다시 구원투수로 나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2014 브라질월드컵’ 이후 축구대표팀과 대한축구협회를 향한 팬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심지어 일부 팬들은 '공항 엿' 사태를 일으켰다. 1무2패로 월드컵을 마친 대표팀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자 새벽부터 마중 나가 귀국 현장에서 엿을 던진 것. 물론 강경한 반응이었지만 분명 대표팀과 축구협회에 실망한 목소리가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다.
그럼에도 축구협회는 홍명보 전 감독을 최근 열렸던 ‘2015 아시안컵’까지 유임한다고 발표했다.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여론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결국, 비판의 화살은 축구협회 내부에 있는 기술위원회로 향했다. 대표팀 경기가 있으면 상대 전력을 분석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기술위원회가 제 기능을 못했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인 알제리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 비판의 근거였다.
축구협회도 여론을 거스르지 못했다. 정몽규 협회장이 사과문을 발표하고 허정무 부회장이 사퇴했다. 이어 축구팬들이 소리 높여 비판하던 황보관 기술위원장도 끝내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미 홍명보 전 감독도 물러난 후였다.
한국축구 전체가 방향을 잃었다. 대표팀 감독부터 기술위원장과 부회장까지 모두 공석이었다. 단순히 대표팀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넘어 축구계 전반을 책임지고 끌고 나갈 지휘소가 붕괴했다.
그때부터 팬들 사이에서는 이용수(당시 미래전략기획단장·세종대 교수)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기술위원장을 역임했던 그를 추억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거스 히딩크 감독을 데려왔던 그때 그 인물을 데려와야 한다는 여론이 모였다.
이미 최고의 성과를 썼기에 더는 위험한 도전을 할 필요가 없던 이용수 기술위원장도 여론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지난해 7월24일 기술위원장을 맡았다. 개인적으로 12년만이자 황보관 전 기술위원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지 2주 만에 이뤄진 매우 급한 선임이었다.
축구협회는 이용수 기술위원장을 선임하며 "기술위원회의 위상을 강화하고 축구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용수 기술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기술위원회의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하기로 했다.
이용수 기술위원 역시 "고민을 많이 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 판단했다. 기술위원회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라고 조심스러워하며 "급한 것은 대표팀 감독은 선임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히딩크 감독, 박지성, 이영표 해설위원도 그의 복귀를 환영했다. K리그 올스타전을 위해 지난해 7월24일 국내에 들어온 히딩크 감독은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한일월드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식도 충분했고 전략적으로도 준비된 사람이었다"라며 "내가 경험한 이 위원장은 한국 축구의 지향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축구협회가 적임자를 제대로 찾았다"라고 치켜세웠다.
박지성 또한 다음날인 25일 축구협회 오찬장에서 취재진을 만나 "이미 기술위원장을 한 번 했던 분이라 한국 축구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표 KBS 해설위원도 "이상적인 지도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기술위원회가 독립적인 역할을 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힘을 실었다.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조영증 프로연맹 경기위원장, 김학범 성남FC 감독(당시 무직), 최인철 여자축구 현대제철 감독, 신재흠 연세대 감독, 정태석 분당베스트병원 재활센터장, 김남표 축구협회 전임 강사, 최영준 축구협회 전임 지도자 등 7명으로 기술위원회를 꾸린 뒤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이어 첫 과제로 내걸었던 대표팀 감독 선임에 박차를 가했다. 이용수 체제로 탈바꿈한 기술위원회는 너무 많지 않은 나이, 유창한 영어 실력, 현재 무직이라 대표팀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열정 등 8가지 조건을 새 외국인 감독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거듭된 회의 끝에 이용수 기술위원장이 가장 먼저 접촉한 인물은 네덜란드 출신의 판 마르바이크 전 함부르크 감독이었다. 하지만 마르바이크 감독은 대표팀 경기가 없으면 네덜란드에서 재택근무를 하겠다는 등의 현실과 동떨어진 조건을 내걸었고, 이 위원장도 과감히 협상테이블을 접었다.
이후 이용수 위원장을 비롯한 기술위원회는 진통 끝에 지난해 9월5일 울리 슈틸리케 감독을 선임했다. 8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자격요건으로 내걸었던 나이, 영어, 무직 등 필수 조건은 채운 선임이었다. 축구협회가 대표팀 감독에게 줄 수 있는 연봉을 고려했을 때 슈틸리케 감독은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사실 슈틸리케 감독은 현역 시절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적인 선수로 불렸지만 스위스와 코트디부아르 감독을 2년씩 맡은 것이 전부일 정도로 지도자 경력은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용수 위원장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부족한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대표팀을 맡으면서 또 다른 좋은 기록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며 "슈틸리케 감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열정과 헌신적인 자세다. 그가 부인과 함께 한국에 와서 유소년은 물론 여자 축구까지 한국 축구의 전반적인 일에 열정적으로 임하고 싶다고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위원장은 "슈틸리케 감독과의 4년 계약이 마지막 외국인 감독과의 계약이길 바란다. 이제는 대표팀 감독을 4년 주기로 선임해 신뢰를 갖춰나가는 체제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급하게 기술위원장을 맡아 여러 까다로운 조건을 맞추는 동시 외국인 감독을 선임해야 했던 답답함과 한국 축구의 미래를 생각한 속마음이 살짝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슈틸리케 감독은 국내 축구계 안팎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용수 위원장은 다시 조용한 행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외국인 감독 선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언론과 접촉했지만 일단 감독이 선임된 이상 뒤에서 조용히 대표팀을 지원하는 본연의 업무로 돌아갔다.
다행히 현재까지 슈틸리케 감독을 선임한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는 게 대다수의 평가다. 슈틸리케 감독은 대표팀 일정과 별개로 K리그와 대학리그 경기장을 속속들이 찾았다. 그 결과 이번 아시안컵에서 '군대렐라'로 떠오른 이정협(상주 상무)과 '제3의 골키퍼'에서 무실점 골키퍼로 탈바꿈한 김진현(세레소 오사카)을 발굴했다. 이 때문에 슈틸리케 감독이 아시안컵 이후 더 많은 시간을 한국 축구와 함께한다면 더욱 긍정적인 현상이 나타날 것이란 예측이 나오고 있다.
지금과 같은 흐름이라면, 이용수 위원장은 히딩크 감독 신화 이후 또 한 번의 한 획을 국내 축구계에 그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슈틸리케 감독 뒤에 있는 이 기술위원장의 조용한 행보를 더욱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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