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로 막은 법안 실제로는 거의 없었다
버니 샌더스·테드 크루즈·박한상 등 번번이 고배
전문가 "필리버스터 법안 처리 막판 단계로 봐야"
더불어민주당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는 새누리당의 테러방지법 국회 처리를 저지할 수 있을까. 유럽이나 미국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필리버스터는 그 선례를 들여다 봤을 때 끝까지 막았던 법안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필리버스터가 정치적 의미로 처음 사용됐던 건 1854년 미국 상원에서 캔자스 주와 네브라스카 주를 신설하는 내용의 법안을 막기 위해 의원들이 의사진행을 방해하면서다. 당시 민주당 의원이 법안 통과 저지를 위해 상원에서 5시간 30분 동안 연설을 이어갔지만 법안은 통과됐다.
스트롬 서먼드 의원은 1957년 인권법 통과 저지를 위해 24시간 8분이라는 역사상 최장 연설 기록을 세웠으나 이 때도 법안은 통과됐다. 미국 차기 대선에 나선 버니 샌더스 민주당 후보와 테드 크루즈 공화당 후보 모두 필리버스터 유경험자이지만 고배를 마셔야 했다.
2010년 당시 버몬트의 무소속 상원의원이던 버니 샌더스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과 부자 감세 법안을 합의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의회 연단에 올라 8시간 37분 동안 연설을 이어갔다. 다양한 주제를 오가며 자신의 뜻을 밝혔음에도 감세 연장안은 그대로 통과됐다.
크루즈 후보는 '오바마케어'(건강보험 개정 관련 법안)에 반대해 2013년 9월 24일부터 다음날까지 21시간 19분간 쉬지 않고 발언했지만 이 법안 역시 만장일치로 의회를 통과했다. 심지어 크루즈 후보 자신도 찬성표를 던져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016년 2월 24일 은수미 더민주 의원의 필리버스터가 있기 전까지 국내에서 가장 길었던 필리버스터는 1969년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3선 개헌을 막기 위해 발언한 것으로, 10시간 15분 동안 연설한 기록을 세웠으나 이때도 개헌안 저지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야당의 필리버스터도 굴욕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벌써 사흘째 이어지는 발언에도 달라질 줄 모르는 여당의 입장 때문이다. 오히려 여당 지도부는 테러방지법과 관련해 '양보 불가 원칙'을 분명히하는 상황이다.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은 이미 야당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한 법안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양보할 내용이 없다"며 야권에서 제기한 재협상론을 일축했다.
김정훈 정책위의장은 "본회의장에서 누가누가 오래 버티나, 누가누가 오래 (발언하는지) 기록경신하나 경쟁하고 서로 오래 했다면서 부둥켜안고, 이게 정신 나간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라며 맹공을 가했다.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도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을 가리켜 "자신이 속한 진보좌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며 평가절하했다.
여야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킨게임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필리버스터가 언제까지 진행될 것인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여당은 선거구 획정안 처리를 위해 여야 합의로 본회의가 열릴 26일에는 필리버스터가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면 야당은 재협상을 하지 않는 한 3월 10일 임시국회 종료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지속할 기세다. 국회법상 무제한 토론을 할 의원이 없거나 재적 의원 5분의 3 이상이 찬성하면 토론이 종결된다. 야당에서 토론을 신청한 의원들이 아직 많이 남았고 새누리당은 의석수가 5분의 3이 안 되기 때문에 토론을 이어갈 수는 있겠지만 도중에 회기가 종료되면 토론은 종결 선포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럴 경우 해당 안건은 다음 회기에서 지체 없이 표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야당 의원들이 이번 회기 내에 몇 시간씩 발언을 이어가 테러방지법을 무산시킬 수는 있어도, 다음 회기로 넘어가면 테러방지법은 자동적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박상철 경기대 교수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간혹 필리버스터의 효과를 봐서 법안이 수정된다거나 하는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강력한 문제제기의 용도이기 때문에 법안을 막는 사례는 거의 없다"며 "지금 더민주가 하고 있는 것도 의사표현 방식, 선거용 퍼포먼스 등 복합적인 내용이 있겠지만 법안을 막지는 못해도 관심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오는 26일 본회의를 열어 여야가 의견의 일치를 본 선거구 획정 기준에 따라 지역구를 조정한 선거법을 처리하기로 했으므로 토론이 중단될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경과 기준이나 발의 시기 등은 합의를 볼 수 있어도 더 지체한다면 되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 필리버스터가 나오는 것은 법안 처리의 마지막 단계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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