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안강민·정홍원 그리고 이한구…칼춤의 최후는?
17대 김문수 경기도 지사 역임, 18대 안강민 자취 사라져
19대 정홍원은 총리 역임, 20대 이한구는 입각설 파다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새누리당의 공천이 마무리 됐다. '친박계'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김무성 대표의 상향식 공천을 뒤로 한 채 비박계, 그 중에서도 친유승민계를 대거 솎아냈다. 새누리당에서 공천심사위원회라는 개념이 생기고 난 이후 세 명의 위원장들은 모두 대개 놀랄만한 결정을 해왔다. 그러나 이후 행보는 제각각이었다.
지난달 초 직에 오른 이 위원장은 취임하면서부터 "당대표는 공천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마이웨이'를 선언했다. 심지어 "당대표는 공천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경고성 멘트까지 날렸다. 우선·단수추천지역제를 사실상 전략공천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김 대표는 "선거를 안 하는 한 있어도 (이 위원장의 주장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격노했고 "공관위를 해체해야 한다"라고 까지 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김 대표와 이 위원장의 갈등은 비박계와 친박계의 대리전 양상을 띠었고 이는 공관위 내부의 분열을 야기했다.
비박계인 황진하 사무총장과 홍문표 제1사무부총장은 지난 11일 무렵 이 위원장이 너무 독단적이라는 이유로 업무를 보이콧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후 17일 최공재·김순희 등 친박계 외부위원들은 자신들이 무시 당하고 있다며 회의 도중 자리를 뛰쳐나가는 일도 생겼다. 그야말로 '아사리판'이었다.
이 와중에도 이 위원장은 자신이 뜻대로 공천을 단행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비박계 의원들이 희생됐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유로 희생된 의원들은 가만 있지 않았다. 권은희(대구 북갑)·조해진(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 의원, 유승민 전 원내대표(대구 동구을), 주호영(대구 수성을)·이재오(서울 은평을) 의원이 차례로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김 대표는 24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 은평을·송파을, 대구 동갑·동을, 달성군 지역을 무공천할 뜻을 밝혔다. 그는 공관위가 원칙의 길을 가지 않았다며 공관위의 결정을 정면 반박했다. 당대표와 공관위원장의 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만 것이다. 이후 원유철 원내대표를 비롯해 친박계 최고위원들은 무공천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발에 김 대표는 대구 동갑과 달성군의 무공천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 전 원내대표와 이 의원의 생존이 확률상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김 대표가 친박계를 상대로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이렇게 이 위원장의 역할은 사실상 끝이 났다.
'막강 권력' 가지는 공심위원장, 이전엔 어땠나?
새누리당에 공심위원장(공천심사위원장) 개념이 처음 도입됐던 것은 17대 총선부터였다. 그 이전엔 당시 권력자가 주도하는 전략공천이 행해졌다. 16대 땐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주도로 공천이 이뤄졌고 15대 땐 여당 총재를 겸하고 있던 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신한국당의 승리를 위해 깊숙이 개입했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경기 부천소사에서 재선 의원을 지내고 있던 김문수 의원을 공천심사위원장으로 결정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2002년 대선에서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얻게 됐고 이 때문에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은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개혁의 아이콘'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김 의원에게 공심위원장 자리가 돌아갔다.
17대 총선에서는 처음으로 경선이라는 제도가 도입됐고 23명의 지역구 후보가 경선으로 결정됐다. 대부분 중앙당에서 공천을 결정했던 이전 사례에 비춰볼 때 상향식 공천이라는 개념자체가 낯설고 어색했지만 첫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김 위원장은 개혁을 외치는 당의 기대에 호응했다. 최병렬 전 대표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그였지만 최 전 대표를 쳐내는 어마어마한 공천을 단행한 것이다. 공천 작업 직전까지 당대표를 역임하고 있었고 4선의 중진 의원이었다는 점에서 김 위원장의 결단은 당시 파격적이라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 역풍이라는 큰 악재를 두고도 299석 중 121석을 획득, 개헌저지선을 막으며 나름 선전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그 해 선거에서 김 위원장도 3선에 성공했고 임기 도중이었던 2006년 지방선거에선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4년 뒤에는 도지사 재선에 성공하며 승승가도를 달렸다.
18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안강민 전 대검 중수부 부장을 공심위원장으로 영입했다. 17대 대선을 겪으면서 친이명박계와 친박근혜계의 갈등이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던터라 계파 색이 옅고 공평하다는 인상을 주기 적당한 안 전 부장이 낙점된 것.
18대 총선 공천은 '친이계에 의한 친박계 학살'로 정리된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안 위원장을 만났다는 소문이 퍼졌고 친이계 핵심들이 친박 살생부를 만들었다는 설도 돌았다. 결국 김무성·강재섭·서청원·홍사덕·박희태·김재원 등 무려 48% 현역 의원들이 안 위원장의 칼날에 여지 없이 공천에서 배제됐다.
안 위원장은 "국민의 여망에 의한 것"이라고 했지만 공심위에 대한 공정성 시비가 줄을 이었고 낙천자들은 '친박연대'란 당명으로 출마해 친이계 후보들을 꺾고 여의도로 귀환했다. 이런 논란 속에서도 한나라당은 과반을 넘는 153석을 차지했다. 친박연대에선 14명만 귀환했다.
안 위원장은 총선 직후 감사원장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공천에서 탈락된 일부 인물들의 강한 거부반응 탓인지 직에 오르지 못 했고 이후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으로 당명이 바뀐 여당은 정홍원 전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공심위원장으로 발탁했다. 공천 주도권을 쥔 자는 친이계 지도부를 무력화시킨 뒤 비대위원장 자리에 오른 박근혜 당시 의원이었다. 당에서는 현역 의원들을 대상으로 당 지지율과 현역 지지율 비교지수, 타 후보와의 경쟁력지수, 현역 재신임지수를 조사해 '하위 25% 컷오프 룰'이 만들어졌다.
이는 곧 친이계 살생부로 명명됐고 당시 의원들 사이에서는 "이재오 의원만 살리고 나머지는 다 배제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결국 박희태·안상수·박형준·박영준·진수희·권택기·전여옥·장광근·진성호 등 친이계 의원들이 줄줄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정 위원장은 이후 박근혜정부 초대 총리직에 올랐고 약 2년에 걸친 장장 721일 동안 임기를 수행했다. 이 기간에는 규제개혁위원장도 함께 수행했다.
불출마 선언했던 이한구, 20대 총선 이후 행보는?
17대부터 세 명의 새누리당 공심위원장들은 각각 원내진입, 정계와 거리두기, 입각 등 다른 행보를 보였다. 공심위원장은 대개 권력자를 대신해 공천권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후 영향력 있는 자리를 보장받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여겨져 온 면도 있다. 이 때문에 이 위원장의 경우 향후 어떤 길을 가게될 지 관심이 모아진다.
대구 수성갑을 지역구로 두고 있던 이 위원장은 지난해 2월 13일 돌연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창조경제 활성화를 위해 더욱 노력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정가에선 이 위원장이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자리를 노리고 불출마를 선언한 것이 아니냐는 설이 파다했다.
경제통인 이 위원장은 현 정부에서 개각설이 나올 때마다 하마평에 오른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의 입각 가능성은 일정 부분 현실화 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이 위원장이 공천 과정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마이 웨이'를 고수한 것도 정권과 어느 정도 교감이 있어서 가능했을 거라는 추측이 줄을 이었다. '이한구 총리설'이 돌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결정된 것은 없지만 일각에선 입각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고 있다. 내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국회 청문회를 거쳐야 하는데 공천 과정에서 당내 의원들과 틀어진 이 위원장에겐 쉽지 않을 길일 것이라는 게 이유다. 18대 안 위원장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한 관계자는 "이 위원장이 저렇게까지 칼 부림을 했는데 나중에 청문회 할 때 누가 도와주려 하겠냐. 현실적으로 입각은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그는 "입각이 아닌 다른 뭔가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이어 "당초 이 위원장이 불출마 선언을 할 때에는 입각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부에서) 불러주지 않은 것 같다"며 "그렇다고 정치를 그만두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야인 생활을 하다가 거물급 정치인의 구원 등판이 필요할 때 다시 떠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이 위원장이 경제정책에 능하고 기업친화적인 점을 내세워 은행권이나 사장 교체 지수가 높은 몇몇 기업의 사장직을 맡을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한편 19대 국회 종료 이후 이 위원장의 행보는 현재까지 명확히 알려진 바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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