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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가 없는 나홍진, 달동네 연변 이어 이번엔 곡성?


입력 2016.05.12 11:17 수정 2016.05.12 11:21        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의 문화 꼬기>천편일률적 주변부 로컬 배경 영화 그칠 때도 됐다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작품 '곡성'이 11일 전야 개봉 7시간 동안 17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배급사 이십세기폭스코리아가 12일 밝혔다.ⓒ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젊은 신예 나홍진 감독을 일약 충무로 스타 감독으로 만들어준 영화는 '추격자'였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였다. 역시 새로운 자극은 언제나 적절한 시점에서 대중적 주목을 이끌어낸다. 그런데 이 영화가 눈길을 끈 것은 소재가 연쇄살인범이라서가 아니라 공간적 공포감을 충분히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원래의 시나리오는 더욱 잔혹했다. 연출자가 슬러시 무비에 침잠해 있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제작사 쪽에서 많이 누그러뜨린 게 그나마 '추격자'였다. 그래서 대중적인 흥행을 했다는 평가였다. 그럼에도 이때이후부터 그의 공간 살육은 시작되었다.

그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주로 달동네였다. 흔히 서민들이 사는 공간으로 인식되는 곳이다. 이 영화를 보자면 온갖 살인 범죄가 일어나는 살육의 공간인데, 문빌리지라는 낭만적인 생각은 아예 폐기해야 했다. 절대 달동네 같은 아니 주변 동네에서는 살면 안되어 보였다. 예컨대 아파트 단지가 제일 안전해보였다. 주변부 로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영화 '황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살인을 밥먹듯이 하는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은 그런 주변 로컬이다. 무엇보다 연변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때문에 정작 촬영 협조를 했던 연변 지역 사람들에게서 크나큰 원성을 받기도 했다.

이번에는 곡성이라는 로컬이 타켓이 되었다. 대중 앞에 공개된 영화 '곡성'도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였다. 잔혹의 공간으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좋은 이미지를 위해 협조했던 로컬 사람들에게 보기 좋게 한방 먹인 셈이 되었다. 이것은 마치 대부도에서 살인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대부도 살인 사건이라며 보도하는 언론과 같았다.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이라 생각되니 한국정서상 지역민들이 놀랄만도 했다. 오히려 곡성 자치단체장의 태도가 대인배였다. 아오모리 사과와 같은 역발상을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역경의 사과는 없기 때문에 그런 효과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서 곡성을 긍정적으로 그려 달라고 애원한 이유는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연출 제작자들의 무의식이다. 그것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고 본질을 외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들이 주변부 공간을 잔혹과 공포의 공간으로 그리기 일쑤이다. 시골, 산촌, 바닷가, 섬, 저수지, 달동네, 쪽방촌 등등은 많은 경우 이런 잔혹과 공포의 공간으로 그려지고 그렇게 그릴수록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는다. 이러한 점은 마치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다른 제3세계의 공간을 공포와 불안, 야만의 공간으로 그리던 방식과 닮았다. 그 때문인지 칸과 같은 영화제에서는 이러한 주변부 로컬을 부정적으로 그릴수록 상을 준다. 제3세계 영화인들을 이러한 코드의 영화들을 들이 밀며 수상을 기대하며, 그러한 수상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고 국내에 돌아와 반열에 올라가려 한다.

반드시 이러한 국제영화제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스릴러나 공포, 액션물을 가리지 않고 그런 장르 영화에서는 주변 로컬 공간은 항상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기 일쑤이다. 이는 왜 일어나는 현상일까. 하나의 짐작은 그러한 장르를 좋아하는 이들은 대개 도시에서 태어나 거주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만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도시 밖을 벗어나면 우범지대이고, 지옥과 같은 공포의 공간에 빠지는 것이라 생각하는 시티 키즈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자연 그 자체는 선호할지 모르지만, 그곳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진입해 들어 갈 수 없기에 로컬인들은 이방인들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무의식적 편견은 영화를 통해 확대재생산된다. 무엇보다 이러한 장르 영화들은 결국 도시 중심주의를 강화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도시 중심의 중심 서울 지역주의를 강화하는데, 이들 영화들이 큰 기여(?)를 하는 셈이다. 주변 로컬로 밀려나면 죽음의 공간에 처하는 것이니 그곳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화려한 중심으로 계속 쇄도하여야 한다. 밝은 중심만이 안전하고 그곳에 연결되거나 매달려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실만일까. 등잔 밑 아니, 등불 밑이 가장 어둡다고 했다. 정말 잔혹한 공간은 주변이 아닐 것이다. 중심의 로컬이다. 세상에 가장 추악한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는 곳은 음습한 공간이 아니며 흔히 우리가 선망하는 화려한 중심부에서 일어난다.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 우리가 욕망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적인 그늘이 바로 인간의 추악함이 얽혀드는 복마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도 몸소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정작 그것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칸 영화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영화를 그곳에 출품하는 것과 같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천편일률적인 주변 로컬 공간 배경의 영화는 그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상을 받는 영화에서는 말이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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