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가 아닌 개인의 선택으로 참여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회"
"강요가 아닌 개인의 선택으로 참여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회"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존중, 배려, 소통 등의 기본가치가 바로선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간 국민대통합위원회는 이런 가치들을 중시하는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사회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통합가치포럼'을 운영해왔다. 포럼에서 논의된 내용을 엮어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한 일곱빛깔 무지개'를 펴냈고, 데일리안과 국민대통합위원회는 이러한 가치를 국민들과 공유하고 확산하기 위해 매주3회, 총 27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주 >
개인의 자유, '선택의 자유' 아닌 '강요된 민주'로 변화
개인을 뜻하는 Individual은 원래 '한 사람'을 뜻하는 수량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에서 '간섭받지 않는 최후의 실존체'라는 의미다. 따라서 '개인'의 진정한 의미는 '독립된 실존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독립된 실존자인 개인들의 관계망을 사회라고 부르고, 적으로부터 자신들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연대하면 국가가 된다. 이렇듯 개인-사회-국가는 3분계의 층위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층위를 모두 통합하는 규범을 우리는 법이라고 부른다. 이때 사회는 개인들의 자발적 참여로 그 질서가 생성되기에 우리는 사회에 대해 사적 자치의 원리를 적용하고, 정치적 공동체의 질서에는 공익을 전제로 하는 공공 원리를 적용한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고대 로마법에서 19세초 근대법에 이르기까지 공법과 사법의 원리가 되어왔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이전의 중립 국가의 개념이 복지 국가로 변하면서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법 체계도 사법과 공법의 이분적 체계에서 '사회법'이라는 중간 영역이 등장하게 되었다. 독일의 헌법학자이자 정치학자 칼 슈미트는 이러한 현상을 '전체 국가(Total staat)'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개념이 '다수의 지배'로 흐르면서 등장한 '사법의 공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이제 더 이상 사회는 개인들의 자발적 참여의 질서가 아니며, 사회는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공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개인의 자유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강요된 민주'로 변화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사회법인 노동법에서 고용주가 근로자를 '급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아니면 함부로 해고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다.
사회의 기초는 개인…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이러한 사회법의 등장은 헌법에서 자유권적 기본권보다 사회권적 기본권이 우월해지는 사회민주주의의 보편화와 동반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헌법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인정하는 '자유권적 기본권'을 천명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회법을 통해 '사회로의 구속'이라는 모순된 법 질서를 노정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양상은 국민들에게 헌법이 천명하는 '행복 추구권'이 자유권적 기본권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적극 보장해 주어야 하는 복지와 같은 '사회권적 기본권'으로 인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의 기초는 어디까지나 개인이며, 사회는 개인들의 관계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공적 질서로서 법이 갖는 규범의 정초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 규범의 정당성이 개인들이 처한 현실의 '구체적 질서'를 정치적으로 수용해서 그 특수성을 보편적 규범에 통합하느냐, 아니면 일반성이라는 예외 없는 규범성에 현실들을 구속해 나가느냐에 따라 개인들의 자유 의지는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전자의 경우, 사회법인 회사법은 개인들의 결사체인 회사들의 정관과 사규를 '사적 자치의 원리'에 따라 인권의 침해가 없는 한 개별적으로 존중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라면 회사법은 공법의 성격을 띠고 모든 회사의 정관이나 사규는 공법 안에 구속된다. 이 두 개의 양상은 개인의 자유를 소극적 자유로 인정하느냐, 적극적 자유로 인정하느냐 하는 법 철학의 문제가 된다.
개인의 선택으로 참여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회
자유권적 기본권에서 개인의 자유는 '하지 않을 자유'를 포함하고, 적극적 자유를 중시하는 사회권적 기본권에서는 개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를 법이 국가에게 명령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초·중등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운동장에 나와 체조를 하게 만든 제도였다. '건강할 자유'를 공적으로 추구한 결과였다. 개인과 공동체는 개인들의 참여적 질서가 자발적인가 강요적인가에 따라 그 관계가 달라진다. 개인들에게 참여가 강요될 수 있는 공동체적 질서는 오로지 '국가'라는 만장일치적 질서 외에는 없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강요적 국민 국가의 질서마저 앞으로 그 정당성이 유지될지는 의문이다. 문제는 국가에 대한 시민의 의무는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희박해지는 반면, 자발적이어야 할 사회적 질서는 '사회적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더욱 강요된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가 자유의 원칙을 망각하고 포퓰리즘으로 흐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가장 좋은 사회는 개인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그 참여를 결정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려하는 사회다. 선택은 자신이 하고 책임은 남들에게 돌리는 사회에서 정의는 설 자리가 없다. 학생이 학교를 선택했다면 학칙을 준수하는 것이 책임이고,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학교를 떠날 결심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직장도 마찬가지로 직장의 규칙과 문화를 사전에 알고 선택했다면 그 룰에 따르려 노력해야 한다. 회사의 특성상 여성 근로자들을 배려할 수 없는 곳에 자발적으로 취업하고서 여성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회사를 노동법 위반으로 고발하는 사태는 이해하기 어렵다. 최저 임금제의 경우도 최저 임금을 줄 수 없는 자영업자는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최저 임금 이하로도 일할 의지가 있는 이들의 근로권을 명백하게 침해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정의라고 인식한다. 이 모두 개인의 자유가 언제부터인가 사회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전체주의화'된 것이다.
글/한정석 통합가치포럼위원
△주요 약력
·현직 : 미래한국 편집위원
·전직 : KBS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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