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미국의 분단 책임론인가
군사적 편의를 위한 38선 획정
만만한 상대를 누가 존중해 주랴
“76년 전 한반도 분단은 강대국 패권정치의 가장 비극적 산물이다. 한국 국민의 뜻에 반하여 미국이 주도하여 분단이 이뤄졌고, 이 분단이 한국전쟁의 구조적 원인이다. 민족분단의 불행을 안겨준 미국은 한국 국민들에게 역사적 부채가 있다”(김원웅 광복회 회장, “미국 의회의 북한전단금지법 청문회에 대한 입장”)
미국 의회의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가 지난 15일(현지시각) ‘한국의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 한반도의 인권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한 청문회를 개최했다. 작년 12월 1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다루는 청문회였지만 표현의 자유 침해 등 한국 대의민주정치의 위기적 상황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아직도 미국의 분단 책임론인가
이 청문회와 관련해서 김 광복회장이 내놓은 입장문의 핵심이 미국의 한반도 분단 주도론이다.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이 이로 인해 초래됐다고 그는 주장했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원죄를 저지른 미국이 무슨 염치로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과 한국의 내정에 대해 간섭하느냐는 뜻인 듯하다.
그런데 비판·비난의 전제가 잘못됐다. “미국이 주도하지 않았으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분단이 없었다면 6·25동란도 발생했을 리 없다.” 이런 논리이겠는데 그게 황당하다.
1. 태평양 전쟁은 일본이 도발했고 미국이 응전해서 마침내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전쟁이었다.
2. (구)소련(이하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일본의 요청에 따라 ‘소·일(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체약국이 제3국과 적대관계에 돌입할 경우 중립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독·소불가침 조약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일본의 중국 및 동남아 침공 시 소련의 간섭이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한 조약이었다.
3. 소련의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독일이 항복한 후 3개월 안에 대일전에 참전할 것을 약속했었다. 독일이 무너진 후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참전 없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원자폭탄까지 투하했던 것인데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의 관동군은 소련군에 의해 맥없이 무너졌다. 소련군은 8월 12일 청진에 상륙하면서 급속히 한반도 안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4. 일본은 미국의 희망과는 달리 시간을 끌다가 8월 15일에야 항복선언을 했다. 한반도에 관한 한 소련은 미국보다 월등히 유리한 지위를 선점한 셈이었다. 미국 전쟁성의 맥클로이(John J. McCloy) 차관보는 8월 10일과 11일 밤에 찰스 본스틸(Charles Bonesteel) 대령과 딘 러스크(Dean Rusk) 대령을 펜타곤의 자기 사무실 이웃 방에 따로 불러 미군의 능력을 감안, 가능한 한 북쪽으로 올라간 선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낼 방안을 마련토록 지시했다.
5. 러스크 등은 북위 38도선을 찾아냈다.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 전쟁성 장관은 태평양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하달될 일반명령 제1호 초안을 작성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트루먼은 수정 없이 13일 영국·소련 및 중화민국에 전달했다.
군사적 편의를 위한 38선 획정
어느 나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러스크는 1947년 제81차 미 하원 외교분과위원회 증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시 소련이 38도선을 수락했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한반도에서의 우리의 군사적 위치를 고려한다면 더욱 남쪽으로 내려온 선을 주장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FRUS, The East 1945. Vol. Ⅵ: 이덕규, “미국의 대한 정책과 한반도 분단의 배경, 현대한국정치연구회편, 『탈냉전의 민족통일론』 재인용)
당시 상황이나 각국의 이해(利害)와 판단 등에 대해서는 긴 서술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식으로 38선은 획정됐다. 그걸 미국이 주도한 것은 맞다. 그러나 소련이 뒤늦게 대일 전쟁에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그런 방안이 강구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소련군이 북한에 진입했을 때 미군은 600마일이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겨우 도착했었다. 소련군은 8월 26일 평양에 입성했으나 존 R.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이 이끈 미24군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했고 그 다음날 일본 총독부 및 38선 이남 조선 주둔군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속도로만 따진다면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전후 처리 과정에서의 더 큰 이익을 위해 미국에 양보했다. 만약 소련이 한반도를 장악했을 경우 대한민국은 아예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유고슬라비아 사절단원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 공산당 부당수)와의 면담에서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이 전쟁은 과거의 전쟁과는 같지 않습니다. 누구나 한 영토를 점령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사회제도를 그 곳에다 강요합니다. 누구나 자기의 군대가 그렇게 할 힘을 가지는 한 자기 자신의 사회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Milovan Djilas, Conversation with Stalin, 1962. ; 류재갑, “6.25전쟁과 북한의 통일정책”, 신정현 편, 『북한의 통일정책』 재인용)
(전후 처리가 끝난 후에 그 분할선이 분단선으로 된 배경을 짐작하게 하는 스탈린의 인식이다. 실제로 분단은 소련에 의해 되돌릴 수 없는 상태로 치달았었다.)
만만한 상대를 누가 존중해 주랴
김 광복회장이 적개심을 부풀리는 부분은 미국이 소련에 38선 이남 지역까지 넘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해했느냐는 말이겠다. 그런데 어쩌나, 그건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따라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낼 지역을 나눈 것이었는데? 그것조차도 미국에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소련은 단 며칠간의 관동군 소탕작전으로 전후 처리에서 자기들의 몫을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25는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이고 민족통일전쟁이었다. 그걸 미국이 개입해서 막았다. 한민족의 통일을 방해한 맥아더를 용서할 수 없다.”
한국 좌파 일부의 인식이 이렇다. 어린아이의 떼쓰기 같은 억지이지만 그게 좌파 일각에서는 신념·신조화 했다.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 입법 강행의 논리도 유사하다. 접적지역의 우리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고 한다. “대북전단 살포 금지법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법”이라는 게 정권 측 논리다. 인권위의 입장도 같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가 북한에는 사활적 위협이 된다. 그래서 날마다 험악한 말로 윽박지르고 온갖 신형 무기로 위협을 가한다. ‘서울 불바다’론을 예사로 떠들어대는 게 북한 김정은 집단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나라를 포기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국군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직접적인 위협이다. 그래서 걸핏하면 도발을 자행한다. 그러니 군대를 해산해야 하는가. 정권 측 논리대로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협박할 때마다 뒤로 물러서는 상대를 어떻게 대할 지는 지켜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만만한 상대일수록 거칠게 대하는 것이 북한의 생리다. 이런 관계는 북한 김씨 왕조가 존속하는 한 바뀌지 않는다. 도대체 저런 북한 김정은 체제에 무엇을 기대해서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는지 문 정권의 실세들과 그 주변세력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민족은 당연히 소중한 존재다. 다만 그 집단은 우리 민족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자기들 관할 하에 있는 민족 구성원들을 핍박 학대하며 공개처형을 자행한다. 평화롭게 공존하려는 남쪽의 민족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대량살해를 공언하며 원자폭탄과 미사일·방사포 등의 무력을 과시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까닭이 도대체 뭔가?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