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성 강렬한 선거용 마타도어
박지원 원장이 왜 거기서 나와?
고급 레스토랑의 진실 밝혀져야
이른바 ‘고발 사주(使嗾)’ 사건의 진실이 내년 대선 전에 명확히 밝혀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의혹사건이라는 게 대개 그렇다. 실체적 진실이 언젠가는 명명백백히 드러나긴 하겠지만 상황이 종료된 이후이기 십상이다. 다른 선거라면 또 모르겠으나 대선에서는 일단 당선자가 결정된 다음엔 선거 과정의 불법성 때문에 그 결과가 무효로 되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
중독성 강렬한 선거용 마타도어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관련해서 제기됐던 3대 의혹사건(후보 아들 병역 비리‧후보 측근 20만 달러 수수‧후보 부인 10억원 수수)은 모두,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 거짓말을, 그 때의 민주당은 거당적으로 대선에 이용했고 그들의 노무현 후보는 승리해서 정권을 장악했다. 훗날 재판을 통해 진실이 밝혀졌다. 모함하고 허위사실을 퍼뜨렸던 사람 몇 명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대통령직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의혹들을 사실이라고 악착스레 주장했던 민주당 인사들이 사과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흑색선전이나 극악한 모함은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인간 이하의 행위이지만 선거에서는 언제나 효과적이다. 그래서 후보나 정당이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걸 실행에 옮기는 것은 아니다. 도덕성과 정직성에서 평균 이상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나 집단이라면 그 효과를 알면서도 그 욕구를 억누른다. 그러는 사이에 도덕‧정직 같은 덕목을 과감히 내팽개치고 흑색선전과 모함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측이 승리를 낚아챈다. 그들의 가치관은 이렇다. “승리가 곧 선(善)이고 정의다. 도덕성은 패배자의 자기 위안이자 기만일 뿐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여권의 유력인사들을 무더기로 고발하도록 사주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고발장과 관련 문건을 김웅 당시 미래통합당 송파갑 총선 후보에게 보냈다는 손준성 당시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현 대구고검 인권보호관)은, 이 사실을 부인한 이후 말이 없다. 김웅 의원은 기억이 희미하다고 했다가 문건을 받아 국민의힘 관계자에게 전달한 것 같다고 하는 등 명확한 전말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 조성은이라는 사람이 등장했다. 아마 여의도 정가에 소문이 돌고 있었던 모양으로, 자신은 전달자도 제보자도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섬으로서 세인에게 알려졌다. 그는 바로 돌아서서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시인했다. 그러면서 잽싸게 대검 한동수 감찰부장에게 공익신고를 했고 휴대전화 제출을 조건으로 보호 대상이 됐다.
박지원 원장이 왜 거기서 나와?
그 문건이 최초 작성자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 시작한 게 작년 4월 3일이었고 김웅 의원으로부터 그것을 전달받은 조성은씨가 인터넷 신문 ‘뉴스버스’ 기자에게 제보한(본인은 제보가 아니고 대화중에 우연히 나왔던 이야기라고 하지만) 게 7월 21일이었다. 뉴스버스는 그걸 지난 2일 보도했다. 바로 그날 김오수 검찰총장은 대검 감찰부에 감찰을, 박 장관은 법무부 감찰관실에 확인을 반사적으로 지시했다. 말 그대로 ‘전광석화’였다(다른 일에도 이렇게 광속의 반응을 보일 것이지).
조 씨가 윤 전 총장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기라도 한 듯 한 분위기가 잠시 흐르더니 갑자기 태풍의 눈 같은 변수가 등장했다. 그가 지난 8월 11일 박지원 국정원장과 롯데호텔 38층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 씨가 당일 그의 페이스북에, 창을 통해 보이는 도심 전경 사진을 올렸고 그게 기자들의 눈에 포착된 것이다.
박 원장은 아주 쉽게 시인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만났다”는 말까지 보탰다. 대수롭잖은 일인 듯 쉽게 말하는 것이 기자들의 호기심을 완화시키는 화법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능수능란한 정치인 출신이니까. 조 씨는 그 사진을 올리며 “늘 특별한 시간, 역사와 대화하는 순간들”이라는 제목까지 붙였다(정말 대단하다. 박 원장이 역사의 반열에 올랐다니!).
작년 4월에 받은 문건을 1년 3개월이나 그냥 갖고 있었다는 게 우선 이해하기 어렵다. 7월에 인터넷 신문에 제보하고 그게 보도되기 전에 박 원장을 최소한 두 번 이상 만난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그게 고발을 사주하는 문건이었다면 21대 총선용이었을 것이다. 그걸 왜 조 씨가 묵혔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때 어떤 이유에서든 써먹지 못했다면 폐기하고 말 일이었을 텐데 왜 지금 와서 문제를 만들었을까? 혹 누군가 그 정보의 이용가치를 상기시켜줬거나 코치를 해 준 것은 아닐까?
박 원장이 조 씨를 그 무렵에 만난 까닭도 궁금해진다. ① 단지 개인적으로 절친한 사이여서 그랬던 것일까? ② 국정원장이 특수 관계가 아닌 일반 지인을 그렇게 자주 만날 수 있을 만큼 한가로울 리 없다(상식인의 판단으로는). ③ 국정원장이 품위 유지를 위해 비싼 식사를 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아무하고나 그런 식사를 하는 것은 직업윤리에 맞지 않는다(그렇다면 조 씨는 특별한 식사 파트너인가). ④ 그 식사 값을 박 원장 자기 지갑에서 지불했는지, 국정원 특활비(전직 국정원장 3명으로 하여금 징역형을 선고 받게 한 그 무서운 특활비)로 충당했는지도 관심사다. 물론 조 씨가 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워낙 비싼 식사인 만큼 식사대금 출처는 반드시 규명돼야 한다.
고급 레스토랑의 진실 밝혀져야
당연히 박 원장은, 조 씨와 둘이서만 만난 자리에서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윤 전 총장의 경우 자신의 수하에 있던 사람이 고발장 등을 만들어 전달했다는 언론보도만으로 지금 ‘고발 사주’ 의혹의 중심에 끌려들어가 있다. 그런데 이 의혹 사건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과 가까운 사이이고, 의심을 받을 만한 시점에 호텔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와 식사를 나눈 박 원장이 그냥 스쳐지나가려 해서야 되겠는가. 의혹을 만들기로 치면 윤 전 총장의 경우보다 훨씬 더 부풀려질 수 있는 사안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괜히 의심을 하는 게 아니다. 조 씨가 12일 SBS에 출연해 ‘고발 사주 의혹’에 대해 앵커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조 씨가 말했다.
“제가 굉장히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접근하기에 어렵다고 생각했다. 날짜와 기간 때문에 저에게 어떤 프레임 씌우기 공격을 하시는데 사실 9월 2일이라는 날짜는 우리 원장님이나 제가 원했던 거나 제가 배려 받아서 상의했던 날짜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자신으로서는 건드리기가 엄청나게 버거웠던 일이었다(누구의 조언이나 힘을 빌릴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우리 원장님’과 논의는 했지만) ‘뉴스버스’가 9월 2일에 보도하도록 한다는 얘기까지는 없었다. 들리는 대로만 이해하자면 이런 말이 된다.
앵커가 이 발언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걸 무마하기 위해 정정해 주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박지원 원장에게는 이건과 관련해선 어떤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해 주시는 거죠?”
“박지원이랑 윤석열이랑 어떤 관계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얘기할 수 없었다는 거죠?”
이건 조 씨의 말이 아니라 앵커의 말이다. 물론 생각도 조 씨의 것이 아니다. 앵커가 이런 식으로 출연자의 발언 내용을 정리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해명의 기회를 주기 위한 인터뷰가 오히려 박 원장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빚을 것 같아 자신의 생각대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은 아닌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만큼 공수처와 검찰(법무부까지도)은 특정인을 겨냥한 수사가 아니라 전면적인 수사로 전환해야 한다. 괜히 민주당 재집권 환경을 만들어준답시고 어설픈 편들기를 하려는 의도가 만에 하나라도 섞여 있다면 당장 포기하는 게 엄청난 진실과 민심의 역풍을 면하는 길이다. 권력을 가진 측이 하고자 하면 어떤 일이든 벌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권력도 훗날의 책임추궁까지 피할 수는 없다. 그게 우리의 경험칙이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