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성장 고려한 정교한 통화정책 요구
1862조 가계부채, 금리시그널로 유도
한은 조직 건강도 38점...처우 개선 시급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공식 취임해 4년 임기를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총재 후보로 지명한 뒤 30일만이다. 여야 합의하에 무난하게 인사청문회를 통과하고, 당일 경과보고서가 채택되며 일사천리로 한은 총재 자리에 앉았지만 앞으로의 길은 녹록지만 않을 전망이다.
‘경제 천재’라 불리는 한은 신임 총재 앞에는 10여년 만에 4%대로 치솟은 물가 해결과 경기 침체 우려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난제가 있다. 코로나19 이후 역대 최대 규모로 불어난 가계부채도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은 내부 조직 혁신도 미뤄둘 수 없는 과제다.
21일 한은에 따르면 이 총재는 이날 오후 국회 인사청문회 태스크포스(TF) 사무실로 사용한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의 1층 컨벤션홀에서 취임식을 갖고, 공식 업무에 돌입했다. 이 총재 임기는 이날 0시부터 오는 2026년 4월 20일 24시까지 4년이다.
이 총재의 최대 과제는 물가 안정이다. 3월 소비자물가는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서 전년 동월 대비 4.1%까지 뛰었다. 10년 3개월만의 4%대 상승률이다. 당분간 이같은 물가 오름세는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올해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기존 전망치(3.1%)를 상회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물가를 잡기 위한 기준금리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칫 경기 하강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거세다. 금리 인상에 따른 차주들의 이자 상환 부담도 부정적이다. 최근 물가 상승이 수요측 요인 뿐 아니라 러-우크라 전쟁, 공급 차질, 임금 등 공급 측 요인도 있는 만큼 상황이 간단치 않다는 분석도 지배적이다. 하반기로 갈수록 우리 경제 성장률도 둔화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 총재도 취임사에서 “단기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미 연준의 예상보다 빠른 통화정책 정상화, 그리고 오미크론 변이 확산에 따른 중국의 경기둔화 가능성 등이 통화정책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경기 회복세가 기존 전망보다 약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어 “성장과 물가 간 상충관계(trade-off)가 통화정책 운용을 더욱 제약하고 있어 정교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정책을 운용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가계부채 문제 연착륙도 시급하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카드사용액(판매신용)까지 포함한 가계신용은 1862조1000억원로 1년 새 7.8% 급증한 ‘사상최대’를 기록했다. 이 총재는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계부채의 심각함을 거론하며, 고통이 있더라도 금리인상 시그널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해왔다.
이날 취임사에서도 “고령화로 복지 수요가 늘어날수록 경제성장에 쓸 수 있는 재정 여력이 감소할텐데, 부채의 지속적 확대가 거품 붕괴로 이어질 경우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는 점을 과거 경험으로부터 알고 있다”고 경계감을 높였다.
한은의 조직 활력을 찾는 것도 그의 몫이다. 최근 한은에서는 연봉, 조직 문화 등 처우 개선에 불만을 품은 MZ세대들의 조기 퇴사가 급증했다. 경직된 조직운영과 민간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연봉 상승률 등을 개선해 조직 혁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지속되고 있다.
앞서 한은은 지난해 조직문화 개혁을 위해 맥킨지에 의뢰해 진단을 받았는데, 황보승희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해당 컨설팅 결과 보고서에서 한은의 조직 건강도는 100점 만점에 38점에 불과했다. 이 총재는 이를 참고해 취임하면 내부 조직 혁신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는 취임식에서도 “한은 임직원들의 힘찬 도약을 위해 인사· 조직 운영이나 급여 등 근무여건을 개선하고 사기를 진작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약속했다.
한은 노조에 대한 이 총재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노조는 전날 성명서를 통해 설문조사에서 “785명 조합원의 56%가 총재 취임에 긍정적”이었다며 “패배주의에 물든 조직 문화를 쇄신하고, 국가·지방자치단체·민간부문 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활용도가 높은 개방형 조직이 될 수 있도록 힘써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