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지선' 패배원인 '냉정 평가' 해야 하는데
전국 돌아다니며 강성 당원 목소리만 울리게끔
직면한 위기, 지지층 결집으로 돌파하는 수법?
관계자 "혁신이란 공격 받을 수밖에 없는 숙명"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체제에서 '전면 쇄신'을 내걸고 야심차게 출범한 '김은경 혁신위원회'가 '노인 폄하 발언 논란' 등 잇단 실언으로 인해 기우뚱거리는 와중에도 전국 순회 간담회를 이어가고 있다.
순회 간담회 자리에서도 민주당 일각에서 애초 제시했던 혁신위의 과제인 '대선과 지방선거 패배 원인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김은경 혁신위원장은 쇄신보다 윤석열 대통령 비난에 힘을 실으며 좌중의 '친이재명계 강성당원'들을 위한 '멍석'을 깔고 있다는 관측이다.
2일 정치권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발언'으로 민주당이 전전긍긍 하고 있다. 당 전략기획위원장인 한병도 의원과 조직사무부총장인 이해식 의원은 이날 오후 서울 용산구 대한노인회를 찾아 김호일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당 차원의 사과 입장을 밝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사자인 김 위원장이 직접 사과하라는 의미다. 혁신위의 실수를 당이 수습하는 촌극이다.
대한민국 경제 성장을 일궈낸 노인들이 분노한 이유가 뭘까. 앞서 김 위원장이 지난달 30일 청년 좌담회에서 아들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남은 수명에 비례한 투표가 합리적"이라고 소개한 게 발단이다.
여기에 양이원영 민주당 의원까지 페이스북에 "지금 투표하는 많은 이들은 미래에 살아있지도 않을 사람들"이라고 쓰면서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김 위원장을 비호하다가 논란이 확산되자 양이 의원은 곧장 사과했다. 그러나 대한노인회는 규탄 성명을 통해 "950만 명의 노인 세대는 김 위원장의 헌법에 보장된 참정권을 무시한 발언에 분노한다"고 성토했다.
두 사람의 망언에 정치권은 발칵 뒤집어졌다. 국민의힘은 이를 '패륜'으로 규정해 총공세에 나섰고, 박주민 민주당 의원조차 YTN라디오 '뉴스 정면승부'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김은경 위원장의 이번 발언은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이었다"고 지적했다.
박용진 의원은 CBS라디오에서 "혁신 내용이 국민에게 잘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혁신위 구성원의 발언이 더 논란이 되고 있다"고 했으며, 김종민 의원도 페이스북을 통해 "민심 감수성이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김 위원장과 혁신위의 공식 사과를 강력히 촉구한다"고 요구했다.
'엎친 데 덮친 격', 김 위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 비난으로 재차 구설에 올랐다. 그는 전날 인천시당에서 열린 '인천시민과의 대화'에서 민주당 혁신위원장직 수락 배경을 설명하며 "'윤석열 밑'에서 통치받는 게 너무 창피했다. 분노가 일었다"거나 "문재인 대통령 때 금융감독원 부원장으로 임명받았다 '윤석열 밑'에서 임기를 마치는 게 치욕스러웠다"고 대통령 직함을 빼고 이름만 거론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 강성 지지자들이 열광할 만한 발언이다. 혁신위가 일부 강성 당원들과의 단절은 고사하고, 오히려 이 대표 열성 지지자들에게 마이크를 들려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혁신위의 전국 순회 간담회에서는 이 자리에 참석한 강성 지지자들의 '대의원제 폐지'와 '수박 청산' 목소리가 여과 없이 울려퍼지고 있다.
혁신위가 전날 인천시당에서 연 간담회에서 이 대표 지지자들은 "수박 XX들 척결하고 혁신하라" "이낙연과 화합하면 총선에서 진다"는 등의 고성을 질러댄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 당원 온라인 소통 게시판인 '블루웨이브'에서도 '2찍'(정부·여당 지지자) '수박'(겉은 민주당 속은 국민의힘) 등의 표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은경 위원장은 이날 오후 강원 춘천 세종호텔에서 열린 '강원특별자치도민과의 대화' 모두발언에서는 "내가 교수라서 철없이 지내서 정치언어를 잘 모르고 정치적 맥락이 무슨 뜻인지 깊이 숙고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있었던 것 같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전국 순회 간담회를 통해 몰려든 강성 당원·지지자로부터 "힘내라"는 응원을 끌어내고 '수박 척결' '대의원제 폐지' '윤석열 탄핵' 등의 목소리 속에서 울먹이는 모습을 볼 때, '정치언어' '정치적 맥락'을 잘 모르기는커녕 되레 강성 지지층 결집을 통해 자신이 직면한 위기를 돌파하는 전형적인 정치적 수법을 구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정치권 관계자는 "평일 저녁에 먹고살기 바쁜 일반 당원이나 시민들이 혁신위원장 간담회에 시간을 쪼개 참석하겠느냐. 목소리 큰 강성 당원들만 모여든 자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과연 혁신위가 지금 해야할 '혁신'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성 당원들이 목소리를 낼 장을 마련해주는 것인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김은경 혁신위'는 향후에도 전국을 돌며 지역별 시민과의 대화를 예정대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혁신위 관계자는 데일리안과 통화에서 "오는 5일에 충청 일정, 7일 대전과 청주 순회 간담회 일정이 예정돼 있다"며 "혁신위의 (순회 간담회) 취지는 중앙집중적 정치를 탈피해서 지역마다 다양한 의견을 듣는 자리로 기획을 한 것이기에 참석자는 당원이건 비당원이건 제한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관계자는 "혁신이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숙명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노인 비하 같은) 발언 때문에 공격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김 위원장 스스로 좀 안타까워하고 계신 것 같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