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스쿨’이 증명한 시스템의 힘
1대 빌리 임선우의 귀환부터 설가은의 도약까지
한국 뮤지컬 시장이 급성장하며 화려한 무대와 스타 캐스팅이 주목받는 가운데, ‘사람’을 키우는 시스템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신시컴퍼니
그 중심에는 신시컴퍼니가 제작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있다. 최근 진행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기자간담회에서 박명선 신시컴퍼니 프로듀서는 작품 제작의 의미를 ‘정직함’과 ‘투자’로 정의했다. 박 프로듀서는 “지난 40년간 수많은 공연을 만들어왔지만, ‘빌리 엘리어트’는 다른 작품에 비해 월등히 많은 시간과 제작비가 투여한 작품”이라고 밝혔다.
그의 발언에 따르면, 이 작품은 상업적인 논리 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성인 배우 중심의 일반적인 뮤지컬과 달리, 주연을 맡을 아동 배우를 처음부터 발굴하고 훈련시키는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박 프로듀서는 “이 과정은 한국 뮤지컬의 기초 체력을 탄탄하게 하고, 어린 인재를 양성하는 정직한 방법을 알려주는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당장의 흥행 수익을 넘어,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 공연계의 인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박 프로듀서가 언급한 ‘정직한 방법’은 이른바 ‘빌리 스쿨’로 불리는 트레이닝 시스템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타이틀롤을 맡기 위해서는 발레, 탭댄스, 아크로바틱, 현대무용, 연기, 보컬 등 광범위한 예술 장르를 섭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제작사는 공연 개막 1년 6개월 전부터 오디션을 통해 잠재력 있는 아이들을 선발하고,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 기간 동안 아이들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무대에 서는 배우로서의 태도와 기본기를 다진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선발해 곧바로 무대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설 수 있는 ‘배우’로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 시스템은 한국 뮤지컬 아역 교육의 표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스템의 성과는 15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2010년 한국 초연 당시 1대 빌리로 활약했던 임선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소년이었던 임선우는 ‘빌리 스쿨’을 거치며 발레에 대한 재능을 만개시켰고, 이후 전문 무용수의 길을 걷게 됐다. 현재 유니버설 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자리매김한 그는 이번 시즌 ‘빌리 엘리어트’에 성인 빌리 역으로 합류했다. 어린 시절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발굴된 재능이 성인 예술가로 완성되어 다시 원작품으로 회귀한 셈이다. 이는 ‘빌리 스쿨’이 단발성 아역 배우 배출소가 아닌, 예술가를 배출하는 인큐베이터임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증거다.
뮤지컬 배우 설가은 ⓒ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신시컴퍼니의 또 다른 대표작 ‘마틸다’ 역시 ‘빌리 엘리어트’와 유사한 아역 육성 시스템을 공유한다. ‘마틸다’ 또한 수개월에 걸친 연습 기간과 고난도의 연기 훈련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이 혹독한 과정을 거친 배우들은 최근 한국 뮤지컬계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주목할 만한 인물은 ‘마틸다’ 출신의 설가은 배우다. 그는 최근 제8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뮤지컬 ‘긴긴밤’으로 조연상 후보에, ‘미세스 다웃파이어’로 주연상 후보에 동시에 이름을 올렸다. 아역 배우가 성인 배우들과 나란히 주요 부문 후보에, 그것도 조연과 주연 부문에 동시 노미네이트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마틸다’의 트레이닝 과정이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을 얼마나 넓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지를 방증한다.
설가은 외에도 ‘빌리 엘리어트’와 ‘마틸다’ 출신 배우들의 약진은 계속되고 있다. 최은영, 임하윤, 천우진 등 해당 시스템을 경험한 배우들은 현재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빌리 엘리어트’와 ‘마틸다’는 단순한 공연 상품을 넘어 한국 뮤지컬 시장에 ‘인재 양성’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박명성 프로듀서가 기자간담회에서 언급한 “정직한 방법”은 요행을 바라지 않고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실력을 쌓게 하는 원칙을 의미한다.
이 시스템 안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이제 누군가의 아역이 아닌, 독자적인 배우이자 예술가로서 무대를 장악하고 있다. 1대 빌리가 수석무용수가 되어 돌아오고, 마틸다가 뮤지컬 어워즈의 주역이 되는 현실은 ‘정직하게 키워낸 작품’이 가진 힘을 증명한다. 화려한 무대 장치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 무대가 길러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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