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제의하며 역사문제 등 도발 계속하는 일본
망언 멈추지 않는한 한일 관계 개선 올해 넘길듯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나흘 간 이어진 박근혜 대통령의 인도네시아·브루나이 순방 일정에서 한일정상회담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일정 중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공개적으로 한일 간 양자 정상회담을 제안했지만, 얼어붙은 한일관계는 한 발자국도 진척되지 못한 모습이다.
회담장 밖 세 차례 만남에도 어색함만 감돌아
박 대통령은 지난 7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 업무만찬에서 아베 총리와 인사를 나눴다. 만찬이 끝난 뒤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의 부인인 아키에 여사와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옆에 있던 아베 총리는 말없이 이 장면을 바라봤다.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 만나 의례적인 인사만 주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아베 총리는 “한일 축제 한마당에 아내가 참석한 얘기를 했고, 한국 요리를 자주 먹는다는 말도 했다”고 밝혔다. 이밖에 양국 정상이 나눈 대화와 관련해선 양측 모두 언급을 삼갔다. 주고받은 대화가 이뿐이란 걸 방증한다.
일본 언론에선 두 정상이 악수를 나눈 것조차 화제가 됐다. 일본 공영방송 NHK는 이날 오후 메인뉴스로 두 정상이 악수를 나누는 장면을 보도했다. 다음날 아사히신문은 1면에 박 대통령과 아키에 여사가 악수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 아베 총리 모습을 실었다. 그만큼 양국 간 관계가 어색하단 의미로 풀이된다.
또 지난 10일 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앞서 정상들 간 기념촬영 땐 아베 총리가 박 대통령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이 포착돼 주목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다른 곳을 응시하다 마지못해 손을 잡는 듯한 상황을 연출했다. 촬영을 마친 박 대통령은 곧장 방향을 틀어 회의장으로 향했다.
이날은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만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지만, 냉랭한 분위기를 감추지 못했다.
더불어 일본 교토통신은 지난 9일 아베 총리는 9일 브루나이 수도 반다르스리브가완에서 “한국·중국 정상과 EAS(동아시아정상회의)에서라도 기회를 잡아 의견을 교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다만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의 제안을 접하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APEC 계기로 두 번째 한중정상회담 치렀지만 일본과는...
박 대통령은 지난 7일부터 9일까지 사흘 간 중국, 캐나다, 호주를 비롯한 8개 국가 정상과 양자 정상회담을 가졌다. 하지만 아베 총리와 별도의 만남은 협의조차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7일 업무만찬과 9일 저녁만찬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의례적인 인사만 나눴다.
이처럼 경색된 한일관계는 전적으로 일본 정치인들의 왜곡된 역사관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한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일본의 역사 인식 변화를 촉구했지만, 일본 측은 오히려 독도·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왜곡된 역사 교육을 강화하는 등 집단 우경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일본 언론은 박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를 지적한 데 대해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라”는 식으로 받아치고 있다. 여기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장관은 최근 한국이 역사문제와 관련한 일본의 노력을 이해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일본 측이 박 대통령의 거듭된 요구에는 묵묵부답으로 대응하며 정상회담만 촉구하고 있는 것.
앞서 아베 총리는 지난 7월 한 민영방송에 출연해 박 대통령이 정상회담 조건으로 일본의 역사인식 변화를 내건 것과 관련, “각 나라가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서로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역사인식 문제를) 외교카드화해서 정상회담을 하느냐 마느냐의 조건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같은 달 언론사 논설실장단과 오찬 자리에서 “정상회담을 위한 정상회담을 했는데 끝나자마자 또 독도, 위안부 문제가 그대로 나오면 그 정상회담은 왜 한 것이냐. 관계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며 “더 악화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노력을, 환경을 만드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은 오히려 도발 수위를 높였다. 광복절인 8월 15일 일본 정치인들이 대거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한 데 이어, 29일에는 보수언론들이 일본의 역사인식을 지적한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비판했다.
특히 지난달 26일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UN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장관과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가졌지만,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로 어떤 성과도 얻지 못했다.
당시 윤 장관은 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인용해 일본 측에 역사문제 해결을 촉구했지만, 기시다 장관은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면서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도리어 기시다 장관은 우리 측의 모든 요구를 묵살한 채 일본산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 철회를 촉구하는 등 자국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했다.
북한도 개성공단 회담 제의 땐 비난 멈췄는데...
한일관계에 대한 박 대통령의 기조는 한결같다. 역사의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언행을 중단하고,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일 때 대화에 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과와 보상은 그 다음 문제다. 일본이 근본적인 역사인식과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정상회담은 어렵다는 게 우리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앞서 박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서도 대화 조건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걸었다. 도발을 중단하고, 공식 채널을 통해 대화에 나서라는 것. 이에 북한은 지난 5월부터 3개월여 간 우리 측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공식적으로 당국자 회담을 제의했다. 이는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7차례의 실무회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일본 측은 요지부동이다. 기시다 장관은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역사문제에 대해 대응했고 이해를 구하도록 설명하고 있다”며 “이런 노력을 이해하지 않는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역사문제에 대해선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무작정 정상회담만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한일정상화담 개최 시기는 빨라도 올해를 넘길 전망이다. 당장 아베 총리가 태도를 바꾸더라도 일본 우익 정치인들이 도발을 멈추지 않는 한, 연내 개최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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