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 41>천국을 갈망한 비밀의식, 신비한 종교의 성지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영혼은 존재하는 것일까? 육신이 죽고 나면 영혼은 어디로 갈까? 세상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가졌던 의문이다. 하루하루의 삶이 소중할수록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커진다. 알 수 없는 세계는 두려움의 시원(始原)이 된다. 인간의 이성과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진다. 이럴 때 종교와 비의(秘儀)는 인간에게 새로운 안식처 역할을 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심은 신비로운 종교의식을 탄생시켰다. 바로 엘레우시스 비의(Eleusinian Mysteries)가 그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생관(死生觀)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세계보다 육신이 살아 움직이는 세계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이런 관념의 일단은 그리스 고전 문학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오디세이아’를 보면, 오디세우스가 죽음의 저승세계에 산 채로 들어가, 지하세계의 그림자 영혼이 된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아이아스 등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을 만나 그들의 하소연을 듣는 대목이 나온다.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우스를 만나 "그대가 여기 사자(死者)들 사이에서 강력한 통치자이니 그대는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라"고 하자,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는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
아킬레우스의 말에서 망자(亡子)의 서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현실의 어떤 구차한 삶도 사후 세계의 어떠한 영광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인의 사생관을 보여준다. 이처럼 그리스인들은 현실의 삶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걱정하고 죽은 후에 가게 될 사후 세계에서의 행복을 약속 받기 위해 현세에서의 방편을 찾는 일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영혼의 구원을 전제로 한 종교가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문화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사후 세계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관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엘레우시스 비의는 그리스인들이 피할 수 없는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고 행복한 사후를 약속해주는 신비로운 의식으로 그리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해서 엘레우시스는 그리스 세계의 신비로운 종교의 성지가 될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엘레우시스 비의에 입문해서 행복한 사후 세계를 영적으로 체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이 꿈꾸는 행복한 사후 세상, 엘리시온(Elysion)은 열매와 꽃과 향기, 음악이 흐르는 이상형이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서정시인 핀다로스(Pindaros)는 ‘엘리시온에서의 부활’이란 시에서 천국 엘리시온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밤을 맞는 동안에
그곳에는 태양이 찬란한 빛을 쏟아 붓네.
그 마을 주변의 초원엔 붉은 장미꽃이 만발하고
황금빛 열매를 가득 단
향기로운 나뭇가지가 그늘을 짓네.
어떤 사람은 말을 타고, 어떤 사람은 운동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장기를 즐기고, 리라를 연주하네.
모든 사람들이 충만한 기쁨의 꽃을 피우네.
사람들은 연이어 신들의 제단 타오르는 불꽃에 온갖 향을 던져
아름다운 땅을 향기로 가득 덮네."
엘레우시스 성역에 흩어져 있는 건축 부재에는 유난히 장미꽃, 횃불, 곡식을 나타내는 부조가 많다. 또 성역 서쪽에 있는 엘레우시스 박물관에서도 관련 유물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핀다로스는 이러한 성역의 신성한 상징들이 엘리시온을 채우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 듯싶다.
엘레우시스 비의는 거대한 장방형의 텔레스테리온(Telesterion)에서 행해졌다. 이 성역은 미케네 시대부터 있었던 메가론(Megaron) 신전 터 위에 세워졌다. 메가론의 직사각형 건물 터전 위에 정사각형의 건물을 계속 확장 개축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로마 시대에는 56m×54.5m에 이르고 기둥이 42개나 될 만큼 거대한 성전(聖殿)이 되었다. 텔레스테리온 남면에는 개방형의 현관이 덧붙여 건축되었다. 건축가 필로(Philo)의 작품으로 ‘필로의 주랑’으로 불린다.
장방형 신전의 중앙부에는 구획된 방으로 만들어진 아낙토론(Anactoron) 성소가 있었다. 밀폐된 아낙토론 성소 안에는 비의에서 입문자들이 보게 되는 데메테르 여신의 성물(聖物)이 보관되었고 사제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성물은 주로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풍요로운 생산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텔레스테리온의 내부 계단식 청중석에는 약 3000명까지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거대한 실내 집회장이었던 셈이다. 엘레우시스 비의는 출입문을 적게 만들어 한낮에도 어두컴컴했다고 한다. 이런 환경은 성스럽게 타오르는 횃불에 의해 더욱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을 듯싶다. 비의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사제들을 통해 데메테르 여신에게 봉헌물을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텔레스테리온 성전에 들어서 제일 먼저 입구에 있는 코레 상에 걸어둔 청동 대야에 담긴 정화수에 손을 씻고 입장했을 것이다.
비의 입문의식은 이틀 밤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째 밤에는 신입 신도들인 미스테(Myste)를 위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들은 하루 동안 금식을 했다가 물, 귀리, 박하로 만든 키케온(kykeon)이라는 죽 같은 음료를 마셨다. 이어 사제들이 가져온 바구니 속의 성물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나서 의례적인 구절을 소리 내어 외었고 사제들을 따라 신성한 노래를 불렀다.
“저는 금식을 했습니다. 저는 키케온을 마셨습니다. 저는 바구니에 있는 물건을 만졌습니다. 행동을 완수한 후에 그 물건을 다시 작은 상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상자를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둘째 밤은 전년도에 입문한 신도들이 한 단계 승격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 의식을 거친 사람들은 비의를 이해했다는 의미에서 ‘눈이 열린 자’라는 뜻의 ‘에포프타이(epoptai)’라고 불렸다. 이들이 겪는 예배의식은 매우 신비로웠다고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음산한 노래가 퍼지던 텔레스테리온의 중앙에 갑자기 횃불이 밝게 빛나면서 환희에 넘치는 군무(群舞)와 합창이 있었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예배 행위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의의 비밀을 누설하는 자는 죽음에 처했기 때문에 그 비밀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엘레우시스 비의의 일부를 묘사한 회화가 남아있기는 하다. 니니온(Ninnion)의 장식판이 그것이다. 아쉽지만 이 그림은 비의의 예비입문자들에 대한 묘사이다. 이 장식판은 아테네 고고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엘레우시스 고고학 박물관에는 복사본이 전시되고 있다. 이 그림의 크기는 높이 44cm, 너비 33cm로 매우 작다. 하지만 엘레우시스 비의의 일면을 추정하게 해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장식판의 그림 구성은 세 국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맨 위의 박공 형태의 삼각 공간에 그려진 그림은 철야 제전의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사각 공간에는 상단과 하단으로 나뉘어 묘사되고 있다. 상단의 오른쪽에 데메테르 여신이 앉아 있고, 횃불을 들고 머리에 화관을 쓴 여인이 머리에 봉헌단지를 인 여인을 여신에게 이끌고 있고, 그 뒤를 지팡이를 들고 화관을 쓴 두 남성이 따르고 있다. 인도되는 여인과 남성 모두 한 손에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다. 무리를 인도하는 여인은 별명이 코레(Kore)로 불리기도 한다.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로 추정된다.
하단의 그림은 제우스와 데메테르의 아들로 알려진 이아코스(Iacchos)가 횃불을 들고 신도들을 오른쪽에 앉아 있는 데메테르 여신에게 이끌고 있는 모습이다. 머리에 화관을 쓰고 지팡이를 든 여성과 남성을 인도하고 있다. 이 그림에 묘사된 내용으로 보면 데메테르 여신에게 봉헌물을 바치거나 경배하기 위한 신도들의 행진이 있었고, 남성 또는 여성의 사제가 의식을 선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신도들로 하여금 사제들이 코레나 이아코스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도록 했을 것이다.
엘레우시스 박물관에는 숭배의 대상이던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와 관련된 중요한 유물들이 몇 개 더 있다. 두 부녀의 모습이 새겨진 부조와 데메테르가 트립토레모스(Triptolemos)에게 농경 기술을 가르쳐 주는 내용을 묘사한 부조가 있다. 모두 이곳 엘레우시스가 데메테르 여신의 모시는 성지임을 말해주는 것들이다.
엘레우시스 성역에는 주 성전인 텔레스테리온 이외에도 크고 작은 성소와 부속 건축물들이 있었다. 대관문을 들어서 왼쪽에 데메테르 여신에게 봉헌할 봉헌 곡식과 보물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또 오른쪽에는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간 지하 세계의 신 하데스를 경배한 성소 플루토네이온(Plutoneion)이 자리하고 있다. 동굴 앞에 세워져 지하 세계로 연결된 것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엘레우시스 성역의 운영을 총괄하기 위해 각종 회의가 열리던 불레우테리온(Buleuterion)도 있었다. 그 터전에 회의장 계단석 등이 남아있다. 비의를 주관하는 사제나 엘레우시스 지방의 유지들이 모여 비의 행사의 계획이나 질서 유지, 성역의 방어와 관련된 정무를 보았던 곳이다.
엘레우시스 성역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했을 듯싶다. 힘든 현실의 삶을 위로 받고 싶었을 이들에게 사후 세계의 행복을 약속 받는 엘레우시스의 비밀 의식이야말로 최고의 힐링(Healing)센터가 되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그렇게 특별하게 두려워하지 않았던 호메로스의 후손들이었지만,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일말의 공포와 두려움은 사후 세계에서의 영혼의 평안한 안식을 희구하게 만들었을 것 같다. 그러기에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농경의 여신 데메테르와 지하세계와 이승을 오가는 페르세포네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현세의 풍요와 내세의 평안을 기원했던 것이리라.
알 수 없는 미래의 세계,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현실이 고통스러운 이들은 내세(來世)의 행복을 기약하면서 힘을 얻는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 현실의 행복을 구하고, 나아가 영혼의 안식을 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물론 현세주의자들에겐 영혼의 안식 문제가 중요하게 생각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완전히 초월할 사람은 드물듯 싶다.
아무튼 내세의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그리스와 로마의 여러 도시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붐볐을 엘레우시스 성역은 이제 고즈넉하기까지 하다. 아침나절이어서 그런지 필자가 성역의 구석구석과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올 때까지 단 한 사람의 관광객도 만나지 못했다. 이제 이곳이 더 이상 내세를 인도하는 성스런 곳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리스를 찾는 관광객 대부분은 아테네를 보고 이곳을 스쳐 지나가 코린토스나 델포이로 향한다. 아마 짧은 여행 일정을 짜면서 이곳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가 보다. 하지만 이곳은 그렇게 경시될 곳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유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선 꼭 방문해야 할 곳 중의 하나다. 이곳처럼 삶과 죽음을 의미를 성찰해 보기 좋은 곳도 드물기 때문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이상향 엘리시온(Elysion)에 가길 꿈꾸었을 것이다. 엘리시온은 어디에 있을까? 엘레우시스 박물관 앞뜰에 있는 호화로운 석관의 주인공도 엘레우시스 비의 입문자였을까? 그는 아마 이 도시의 세력가나 부호였을 것이다. 그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석관에 안치되었지만, 죽어서 엘리시온으로 갔을지 아니면 악귀에게 고통 받는 곳을 갔을지 알 수 없다. 아무튼 호화로운 석관이나 분묘의 치장은 죽은 자의 안식을 기원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위안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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