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내 할아버지는 4.3때 남로당이 생매장했는데 왜?"


입력 2016.04.03 08:04 수정 2016.04.03 08:05        목용재 기자

<인터뷰>제주4.3 남로당 희생자 유족 이동해 씨

"군경 의한 희생자만 부각 폭도 희생자도 밝혀야"

제주4.3평화공원에 4.3희생자 각명비가 세워져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제주 4.3사건 당시 무장폭도들에게 조부를 잃은 이동해(69)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정립유족회) 공동대표. 이 대표는 제주4.3사건에 대해 정부 군‧경에 의한 제주도민의 학살로 묘사하는 정부 보고서 및 각종 서적, 연구 결과물 및 주장 등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 중 한명이다.

1948년 4월 3일부터 정부 군‧경의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전까지 이뤄진 민간인 학살 주체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무장 폭동세력이었다. 이러한 제주 4.3 사건의 배경설명 없이 제주도민들을 학살한 주체를 정부 군‧경으로만 몰아가는 현재 상황에 이 씨는 염증을 느끼고 있다.

이동해 대표는 제주도에서 '데일리안'과 만나 "4.3사건이 왜 이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면서 "토벌군(진압군)에 의해 희생된 제주도민이 1만2000여명에 이르지만 폭도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도 17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폭도들에 의해 제주도민이 희생됐다는 사실은 왜 알리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이 대표의 조부인 이도종 목사(1892년생)는 제주도에서 4.3사건이 터진지 두 달 보름이 지난 1948년 6월 18일 금요일 무장 폭도들에게 붙잡혀 생매장 당한 희생자다.

제주 4.3사건 당시 남로당 무장폭도들에게 희생당한 이도종 목사의 손자인 이동해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공동대표.ⓒ데일리안
당시 이도종 목사는 성경책과 성가책, 회중시계를 넣은 가방을 자전거에 싣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순회 목회 차 자전거에 올라타 교우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교우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자신을 향해 "미제 스파이"라고 소리치는 무장폭도에게 붙잡혀 무장대를 위한 기도를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하자 생매장 당했다. 이 목사는 생매장 당하기 직전 폭도들에게 성경책과 성가책, 회중시계를 건내주며 "선물로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 목사가 실종된 지 1년이 지나는 시점에서 이 목사를 생매장한 폭도가 붙잡혔고, 폭도가 지니고 있던 회중시계로 인해 이 목사의 선교 소식이 가족들에게 전해졌다.

이동해 대표는 "1년이 지나서 폭도가 증언한 곳으로 가보니까 조부의 몸은 부패 됐지만 옷은 그대로였고 기도하는 모습이었다"면서 "할아버지께서는 제주 1호 목사이시자 1호 선교사가 돼셨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무장폭도 사령관인 이덕구의 수첩에서도 할아버지가 순교하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덕구의 수첩에는 '고산 출신 반동목사가 순회 강연가는 것을 발견해서 숙청'이라고 적혀있다"면서 "그런데 4.3보고서에는 이덕구의 수첩내용도 들어가 있지 않고 경찰들이 제주도민들을 학살한 것으로 돼있다. 이런 점을 지적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아울러 무장폭도들에 의해 살해당한 군경들도 희생자임에도 불구,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조차 4.3보고서에는 기재돼 있지 않다. 전 제주경찰서장 출신으로 퇴직이후 제주 4.3사건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김영중 씨도 군경의 희생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김영중 씨에 따르면 정립유족회는 남로당을 중심으로 하는 무장폭도들에 의해 희생당한 경찰을 추모하기 위해 추모비석 4개를 최근 세웠고 추가로 8개의 비석을 세워 총 12개를 마련할 예정이다. 4월 3일 남로당 무장폭도들에 의해 제주도 경찰서 12개지서가 피습당해 경찰관들이 희생당한 것을 기리기 위함이다.

김 씨는 본보에 "군인과 경찰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당시 경찰들이 그랬다"면서 "경찰 선배들이 대한민국 건국 즈음 습격당해 희생당했는데 이들을 기리기 위해 현직 경찰들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중 전 대한민국대향경우회 제주도지부 회장.ⓒ데일리안
김 씨는 앞서 지난 2003년 3월 정부에서 제1차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을 당시 전직경찰의 입장에서 제주4.3 보고서의 잘못된 부분에 대한 수정 의견을 제출하기도 했다. 2003년 3월 29일 조건부로 채택된 보고서는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추가 심의를 거쳐 수정할 수 있도록 6개월의 시한을 둔 이후 같은 해 10월 15일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채택했다.

당시 김 씨는 대한민국재향경우회 제주도지부 회장으로서 각종 자료 취합 및 증언을 청취해 140페이지에 달하는 수정 요구서를 공동명의로 제출했지만 제주4.3위원회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당시 우리 경찰이 당사자였는데 보고서의 왜곡된 부분에 대해 문제제기 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왔었다"면서 "전국적으로 376건의 추가 심의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반영된 것은 단 33건이고 자구 수정정도로 반영됐다. 수정의견에 대해서는 4.3위원회가 99% 무시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제주 4.3은 주동이 남로당이고 원인제공자이고, 이를 군경이 부차적으로 토벌하게 된 것인데 보고서에는 원인제공자에 대한 내용이 빠져있다"면서 "오직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례를 과장시키고 있다. 실정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목용재 기자 (morkka@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목용재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