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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은 왜 혼자만의 시간에서 탈출하려 했나


입력 2016.11.04 05:11 수정 2016.11.04 10:32        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의 문화 꼬기>가려진 시간 많을수록 함께할 시간 없어져

강동원 신은수 주연의 '가려진 시간'은 친구들과 함께 산에 갔다가 다음날 혼자 구조된 소녀와 며칠 후 훌쩍 자라 나타난 소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는 판타지 멜로다.ⓒ(주)쇼박스

시간이 멈춘다면 온전히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나만을 위해서 시간이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사람들은 신경을 쓰지 않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될 듯싶다. 돈을 벌기도(?) 하고 먹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은 거침없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지만, 영화 ‘가려진 시간’은 이런 환타지 같은 상황을 담아내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터널 공사장에 갔다고 우연히 들어간 동굴 속에서 빛나는 알을 줍는다. 그 알은 시간을 멈추게 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간은 공간과 같이 짝을 이룬다. 자신만의 시간이란 자신만의 공간을 동반한다. 시간이 멈춘 사이로 들어간 그들은 신나기만 했다. 그 알 때문에 정말 자신들이 하고 싶은 행동 아니 일탈 행동까지도 마음껏 누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생활은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천식이 있던 친구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그만 목숨을 잃고 만다. 남은 두 사람도 일상이 똑같을 뿐이었다. 그 똑같은 일상을 견디지 못하는 두 사람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침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버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만다.

또한 주인공도 그러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그 가려진 시간 속에 있다면 좀 다른 문제였을까. 하지만 정말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가려진 시간 속에 빠지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둘만의 시간 속으로 가자고 미혹시킬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자신들만의 시간’은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여유만을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혼밥 혼술 혼영 혼창...나홀로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담론이 많다. 매우 긍정적이고 행복에 겨운 이미지가 교차한다. 드라마 ‘혼술남녀’에서 단골로 나왔던 자신만을 위한 온전한 시간과 즐김을 뜻하고 있는 듯싶다. 비즈니스 관점에서는 새로운 상품의 개발과 판매라는 점에서 무궁한 시장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가려진 시간’에 견주어 본다면 이런 나홀로 문화는 다른 관점에서 대하게 될 수 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도 다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시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혼자 있는 이들에게 위안과 합리화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러한 나홀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만의 시공에 있다면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 만약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사람들과 같이 있을 수 있을지 의문이게 된다. 각고의 노력 끝에 돌아온 성민(강동원)을 수린(신은수)일 처음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기억과 언어를 공유하는 그들도 그러한데 주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미 다른 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다른 공간을 배태하기 때문에 시공이 달라졌다는 것은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 미래도 같이 할 수 없다는 점을 내포한다.

정말 집단과 조직, 인간관계에 치인 사람들이라면 혼자만의 시공간을 염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상에서 그러한 시공간을 가질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시공간은 찰나적인 것이며, 다른 관계들이 전제되어야 생명력을 갖는다. 오로지 혼자만의 시공간이 영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혼자만의 시공이 아니라 타인과의 시공과 자신의 시공을 넘나들 수 있는 훈련일 것이다.

그러한 트레이닝이 없다면, 각 개인만이 아니라 다른 관계들도 불편함을 줄 것이다. 가려진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은 더 멀어진다. 그러나 항상 자신만을 위해서 생각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민(강동원)처럼 사랑하는 사람(수린)처럼 누군가를 위해 그 가려진 시간의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명분이나 목적이 개인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고 공동체나 국가에 관한 희생과 현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통해서만이 그런 사람을 접하게 되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현실과 전혀 다른 판타지 같은 요소만 내포하는 것일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현실에 대한 공감을 많이 떨어지게 되므로 감동은 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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