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와 '흥망성쇠' 함께 한 전경련...최순실 사건으로 간판 내려
한국 경제 활성화 선봉에서 정경유착 꼬리표까지
한기련, 과거와 단절 선언…민간경제외교 역할 집중
한국 경제 활성화 선봉에서 정경유착 꼬리표까지
한기련, 과거와 단절 선언…민간경제외교 역할 집중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산업화 초기 경제발전과 재계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동반자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50년만에 간판을 내리게 됐다.
전경련이 24일 혁신안 발표를 통해 ‘한국기업연합회(한기련)’로 명칭을 바꾼 것은 사실상 과거와 단절을 선언하고 새출발의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전경련은 고 이병철 초대 회장 등 경제인 13명이 ‘한국경제협의회’라는 이름으로 1961년 1월 설립됐다. 1968년 전경련으로 간판이 바뀌었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과 함께 경제 5단체로 불렸고 그중에서도 재계 핵심 단체로 여겨졌다. 이는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구자경 LG 명예회장, 최종현 SK회장, 김우중 대우 회장 등 주요 대기업의 총수들이 돌아가며 회장을 맡으며 한국 경제 활성화의 선봉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 전경련은 재계에서 가장 위상 높은 단체로 군림했다. 설립 초기부터 외자 도입과 수출자유지역을 건의해 기업규제와 수출 정책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정부와 가교 역할을 통해 이해관계를 절충했다.
제조업강국, 7대 수출강국, IT선진국, 무역규모 1조달러시대, 20~50클럽(인구 5000만명 국가중 국민소득 2만달러 진입한나라) 가입 등은 전경련의 가시적인 성과로 꼽힌다.
다만 개발연대와 군부정권시절 정경유착의 폐단도 많았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이는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쥔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불가피한 현상이었고, 집권자에게 미움을 받으면 그룹이 분해되는 환경에서 정치자금은 생존을 위한 준조세였다는 분석이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치권과 전경련의 밀월관계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재계에서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 초기 단행한 금융실명제 도입, 공정거래법 강화 등이 재벌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한 측면이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위상이 크게 약해졌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주범으로 전경련을 지목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경련은 1998년 초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약속한 5대 그룹 사업 구조조정(일명 빅딜)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구본무 LG그룹 회장 등 일부 재벌총수는 전경련과 불편한 관계가 됐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전경련과 거리를 두기도 했다. 선뜻 회장을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현재의 모습처럼 인물난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
이명박 정부까지 존재감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전경련은 박근혜 정부 들어 위상을 되찾는 듯 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여론은 전경련을 정경유착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박근혜정부의 문화융성과 스포츠 지원을 위해 미르 ·K스포츠재단에 기금을 낸 것이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대가를 바라고 낸 이면거래라는 의혹을 극복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전경련은 해체 대신 뼈를 깎는 쇄신을 선택했다. 허창수 회장은 지난 50년간 사용해 온 명칭을 한국기업연합회로 변경했다. 기존 7개 본부 체제를 1본부 2실 체제로 변경하면서 조직을 대폭 축소했다.
정경유착과 단절을 선언한 한기련은 주로 위원회·협의회 등을 통한 소통 기능과 한미재계회의 등 민간경제외교 역할에만 집중할 계획이다.
허 회장은 “혁신과 쇄신이 말로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며 변화된 모습으로 또 다시 한국경제 도약에 힘을 보탤 것”이라며 “회원사와 국민으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회복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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