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 적극적 '스킨십 정치'…'열정의 불씨' 옮기기
주변 의원·당직자들에게 '불씨' 옮겨붙는 모양새
절망 속 '불씨' 주목했던 '우에스기 요잔' 되려나
地選참패로 '잿더미' 바른미래당 대표된 손학규
"미미한 '불씨' 있더라" 어떤 희망을 본 것일까
"다 꺼진 줄 알았는데 불씨가 있더라. 미미한 불씨가…"
'막걸리 회동'을 이어가고 있는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최근 만찬 자리에서 '불씨'를 자주 화두에 올린다고 한다.
사반세기 정치를 해오며 수 차례의 거대정당 대표와 대선후보 경선을 치렀던 자신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바른미래당 대표를 맡았는지를 설명하면서 나오는 화두다.
실제로 손 대표가 전당대회에 나서기 직전에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를 보면, 바른미래당의 처지는 참담 그 자체였다.
광역·기초단체장이 단 한 명도 당선되지 않은 것은 물론 광역의원은 전국에서 5명이 당선됐는데, 그 중 4명은 비례대표였다. 나머지 1명은 사실상 기초의원이나 다름없는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당선됐다. 기초의원은 21명이 당선됐다. 당의 국회의원 수(30명)에도 미달하는 광역·기초의원 당선자를 낸 셈이다.
천하의 손학규 대표라 해도 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손 대표는 뭘 봤기에 "불씨가 있더라"고 하는 것일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불씨'를 보고 희망을 찾는다는 것은 일본의 역사소설가 토몬 휴우지(童門冬二)의 '불씨'를 연상시킨다. 전국대명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의 가문을 승계한 에도 시대의 영주 우에스기 요잔(上杉鷹山)의 개혁정치를 다룬 소설로 유명하다.
한때 120만 석이 나는 영지를 다스리다 잇단 정치적 판단 착오로 30만 석으로, 다시 15만 석으로 세력이 '8분의 1토막' 나며 파산 위기에 내몰린 우에스기 가문, 중신들은 패배주의에 젖어 있고 하급무사들은 하루하루 형식적인 업무만 소화하며, 영민들은 계속된 '개혁'의 실패로 냉소에 빠져 있다. 마침내 파탄을 인정하고 영지를 반납하자는 말까지 나온다.
절망감 속에서 영지로 향하던 우에스기 요잔은 가마 안에서 꺼진 등잔불을 응시하던 중, 미미한 불씨가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재를 뒤적이고 입김을 불어넣으며 불씨를 살려낸 요잔은 이를 개혁의 상징으로 삼아 주위 사람들과 파산 위기에 몰렸던 영지를 다시 일으켜세운다는 내용이다.
1983년 출간된 '불씨'는 89년 NHK 대하사극으로 제작된 뒤 선풍적 인기를 끌어, 90년대초에는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됐다. '불씨'는 '개혁정치'를 내세우던 김영삼정부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280질을 구매해 청와대 직원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된 손학규 대표도 '불씨'를 접했을 개연성도 있다.
상처 입은 당 사무처 당직자, 워크숍 통해 위로
패배주의 타파…'열정의 불씨' 옮기기 본격화
'불씨'에 묘사된 우에스기 가문과 바른미래당이 처한 객관적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야심차게 출범했던 국민의당은 지난 2016년 총선에서 호남을 석권함은 물론 정당득표율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앞지르며 '제1야당'을 선언할 정도의 기세였다. 하지만 대선과 지방선거를 거치며 잇단 정치적 판단 착오로 세력은 '8분의 1토막' 이상으로 위축됐다.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헌정사상 최초로 1000명이 넘는 역대 최다 낙선자를 내며 당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의원들은 패배주의에 젖어 정치인생을 정리하려 하거나 다른 정당에 눈길이 향해 있으며, 당직자들은 구조조정으로 사기가 저하됐다. 국민들은 바른미래당의 몸부림에 냉소로 일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 대표로 맡은 손학규 대표는 과연 바른미래당에 남아 있는 미미한 '불씨'를 다시 살려내 큰 불길로 키워내는 우에스기 요잔이 될 수 있을까.
손 대표는 지난 2~3일 사무처 당직자들과 홍천 대명리조트에서 워크숍을 가졌다. 과거의 당직자 워크숍에서는 서로 간에 언성이 높이는 등 불미스런 일들이 있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바른미래당 당직자들의 표정이 부쩍 밝아졌다는 말들이 들린다. 요잔이 주위 사람들에게 '불씨'를 개혁의지의 상징으로 옮겨붙여주듯, 손 대표가 당직자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패배주의를 떨쳐내려 하는 모습이다.
우에스기 요잔은 미복 차림으로 민정을 시찰하는 등 '스킨십'을 가장 중시했다. 신분을 숨긴 채 촌락 노파의 수레를 밀어주다가 측근의 비리를 눈치채기도 했다. '영지의 미래'에 투자한다며 향교를 복구할 때에는, 자신이 직접 영지의 경계까지 나가 에도의 저명 유학자를 맞이하는 것을 마다 않았다.
"각자가 '불씨' 돼달라, 나도 나를 불태우겠다"
바른미래당의 '우에스기 요잔'이 될 수 있을까
소탈한 '막걸리 회동'을 연일 이어가고 있는 손 대표의 행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손 대표는 잇단 회동에서 귀를 열고 당을 위한 여러 쓴소리를 가감없이 전해듣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바른미래정책연구원장으로는 홍경준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영입했다. 손 대표는 지난달 17일 발기인총회 및 창립이사회에 직접 참석해 홍 원장에게 힘을 실었다.
이러한 손 대표의 행보는 '스킨십'에 취약하다고 알려진 안철수·유승민 전 대표와 가장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손 대표는 최근 만난 사람들에게 책을 선물하거나, 이튿날 안부 전화를 챙기는 등 '감동'을 주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손 대표와 자리를 가진 당 관계자는 "스타일이 너무 다른 '대인배'"라며 "그날부로 '손빠'가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스킨십'의 결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열정의 '불씨'가 옮겨붙고 있다는 관측이다.
최근 지상욱 의원이 페이스북에 "우리(바른미래당)는 설렁탕 집이냐, 짜장면 집이냐"며 "원하는 걸 다 만들어드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맛은 소위 '바미스럽다'고 일컬어지기조차 한다"고 쓴소리를 하자, 오신환 사무총장은 "푸드코트엔 원래 설렁탕·짜장면·냉면 다 판다"며 "정히 입맛 없으면 한끼 굶고 드셔보시라. 맛도 참 좋다"고 맞받았다.
오신환 사무총장과 지상욱 의원은 본래 같은 바른정당계로, 지난해 11월 바른정당이 분당될 때 유승민 전 대표와 함께 '개혁보수'를 지키겠다고 남은 사이다.
그럼에도 지 의원의 비판에 오 사무총장이 앞장서서 반박에 나선 것은, 손학규 대표의 '불씨'가 가까이에 있는 오 총장에게 옮겨붙은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가마 속 등잔에서 불씨 하나 살려냈다고 우에스기 요잔의 정치개혁 시도가 순탄했을 리 없다. 시련도 겪고 실패도 있었다. 반대파의 집단 반발을 참고 참다가, 막부에 참소(讒訴)하려 하는 지경에 이르자 참다 못해 중신 2명을 할복 지시했다. 개혁파였던 자신 측근의 비위 행위가 적발되면서 개혁의 도덕성 자체가 훼손되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손 대표가 선출된지 이제 두 달 남짓 지났다. 아직 지도부의 구심력이 미미해 의원들은 각자 자기정치에 몰두하고 있다. 앞으로도 별별 일을 다 겪게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불씨'가 돼, 자신의 가슴에 붙을 붙인 뒤 타인의 가슴으로도 그 불을 옮겨달라"며 "그러기 위해 나도 나 자신을 불태우겠다"고 천명했던 우에스기 요잔처럼, 손 대표도 사심없이 자신을 '불씨' 삼아 바른미래당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옮겨붙여 나간다면 언젠가 당 전체가 다시금 열정의 불길로 하나될 날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
손 대표의 '불씨' 옮기기 행보를 앞으로도 주의깊게 지켜볼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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