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 친원전 내세운 '탈원전 밀당' 노림수
고리2호기 등 노후원전 계속운전 추진…최근 이슈 물타기 포석
일각에선 "쇼맨십에 불과, 속내는 탈원전" 반박도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문재인 대통령 탈원전 추진 특명을 받았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친정부 계열 인사로 꼽힌다. 그가 부임한 이래 한수원은 '원자력회사이면서 원전 폐쇄에 앞장선다'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다.
그랬던 정재훈호(號) 한수원이 최근 몇몇 원전 재가동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 사장 의중을 두고 한수원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원전'에서 '원전 가동' 쪽으로 기조를 바꾼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는 반면, 증폭된 원전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한 보여주기식 행보일 뿐이라는 반대 해석도 팽팽하다.
◇ '탈원전 낙하산' 정재훈, 친원전으로 돌아선 배경은?
먼저 한수원이 지난달 8일 산업통상자원부에 신청한 신한울 3·4호기 발전사업 허가기간 연장은 정 사장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주장이 한수원 한편에서 제기되고 있다.
한수원 직원 A씨는 "한수원 신한울 3·4호기 연장 신청은 정 사장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며 "최근엔 고리 원전, 월성 원전 등 차례로 설계수명 종료가 도래하는 원전 계속운전 추진 검토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동안 탈원전 투사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파격적 행보다. 이를 두고 탈원전 정책을 추진했다가 역풍을 맞은 월성1호기 감사 효과일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문재인 정권 말미에 이르면서 출구전략을 시도하는 것이란 의견도 나왔다.
그런가 하면 탈원전을 강행하며 노조와 불화를 겪었던 정 사장이 원자력 노동자들을 향한 포용 전략을 쓰는 것이란 분석도 있다. 전임노조가 물러나고 노조 구성원들이 대거 교체된 최근 한수원은 어느 때보다 노사 관계가 물꼬를 텄다는 평가가 흘러나온다. 이들 생계인 원자력을 열어줌으로써 탈원전 정국으로 냉각된 노사 관계를 해소하려는 정 사장 의지라는 것이다.
그런 노조 화두가 바로 신한울 3·4호기다. 한수원 노조는 지난 16일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앞에서 한국전력기술 노동조합, 두산중공업 노동조합 등과 함께 신한울 3·4호기 발전사업 허가기간 연장을 촉구하는 집회를 벌였다.
신한울 3·4호기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공사가 중단된 터라 이번 연장 신청이 2월 26일 전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발전사업허가가 취소된다.
한수원 노조 관계자는 "정재훈 사장은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 노후 원전의 계속운전 등 원전 추진에 나서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의 원전 행보는 원자력 종사자들의 가치와 공유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외부에서는 탈원전을 강력히 추진하는 것으로 비춰지지만 최근 사내에서 (정재훈 사장이) 하시는 활동과 차이가 있다"고 덧붙였다.
◇ "신한울 3·4호기, 고리 2호기 추진 쇼맨십일뿐…속내는 탈원전 유지"
반면 정 사장 행보에 대한 완전히 다른 각도의 해석도 한수원 내부에서 흘러나온다. 정 사장이 원전 추진 쪽으로 방향을 돌이켰다기보다 월성 1호기 조작, 대북 원전 논란 등으로 증폭된 원전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 적정 선에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정 사장은 한수원 내부에서 노후 원전 재가동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액션만 취할 뿐 사실상 계속운전을 추진하기 위한 실무는 전혀 진행하지 않고 있다.
감사원은 지난해 10월 월성1호기 조기 폐쇄 관련 감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수원에 "산업부 장관과 협의해 향후 원자력발전소 계속 가동과 관련된 경제성 평가가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관련 지침을 구체적으로 마련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한수원은 한 달 뒤인 11월 원자력안전위원회에 고리2호기의 계속운전 신청 기한을 1년 더 연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원자력안전법상 고리2호기 설계수명 만료(2023년 4월) 2년 전인 2021년 4월까지 계속운전 여부를 결정해야 하니 감사원 주문 사항을 반영할 수 있게 기한을 더 달라는 것이다.
원안위는 "계속운전 신청은 원자력법령에서 기한을 따로 정하는 법이 없으니 나중에 필요할 때 하면 된다. 주기적안전성평가(PSR) 보고서부터 빨리 내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한수원은 "규제기관의 방향이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고리2호기의 계속운전 추진 여부도 결정할 수 없다. 원안위 방향이 확정되면 후속 조치를 이행하겠다"는 식으로 일관했다.
표면적으론 두 기관 법령해석에서 충돌을 빚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수원이 규제기관인 원안위 결정을 노후원전 계속운전을 추진하지 않기 위한 구실로 삼은 것이란 해석으로 풀이된다.
실제 정 사장은 지난해 10월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황보승희 의원(국민의힘)으로부터 고리 2호기를 포함한 원전 4기에 대해 "수명 만료가 코앞인데 단 한 기도 원안위에 계속운전 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사실상 월성1호기 조기 폐쇄와 같은 논란이 재연될 가능성을 우려해 위험부담을 정부와 규제기관에 떠넘기려는 행태라는 분석인 셈이다.
한수원 직원 B씨는 "원안위는 당연히 법령에 계속운전 PSR보고서를 수명만료 2년 이내 제출하게 돼있으니까 법령에 나와있는대로 추진할 수밖에 없다"며 "정 사장이 원안위 결정을 핑계 대고 원전 추진을 스스로 멈춰버렸다"고 지적했다.
B씨는 이어 "한수원 내부 동향을 살폈을 때 어느 부서에서도 PSR을 추진하지 않고 있으며 어떠한 지시도 없었다"며 "PSR을 빨리 해야 설비개선 등 후속 과정을 진행할 수 있는데 손을 놓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