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유령', 35년 만에 첫 흑인 크리스틴 탄생
차지연 "성별 넘은 선의의 경쟁...기회 많아졌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난해 2월, 공연이 중단 된지 약 1년 6개월 만에 영국 런던 허 마제스티 극장이 문을 열었다. 공연 재개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더 눈길을 끄는 건 뮤지컬 캐스트였다. 극장 재개 이후의 첫 공연은 ‘오페라의 유령’이었는데, 여주인공인 크리스틴 다에 역으로 흑인 배우 루시 세인트루이스가 무대에 올랐다.
1986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오페라의 유령’은 가스통 르루의 소설을 원작으로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곡을 써 완성됐다. 이후 전 세계에서 1억 4000만명 이상이 관람한 고전이지만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를 통틀어 흑인 배우가 ‘오페라의 유령’ 크리스틴 역할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16년 브로드웨이에서 아시아계 미국인 알리 에월트가 크리스틴을 연기한 것이 유색인종으로는 최초였다.
최근 영미 공연계에서서는 피부 색깔, 즉 인종이나 민족과 상관없이 캐스팅하는 ‘컬러 블라인드 캐스팅’이 증가하는 추세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지난 2008년 뮤지컬 ‘위키드’의 여주인공 엘파바, 2014년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 2015년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등의 역할에 흑인을 캐스팅했고,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도 2016년 연극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에서 헤르미온느 역으로 흑인을 캐스팅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세인트루이스는 개막 공연을 앞두고 가디언 등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침내 이 자리에 서서 다른 유색 인종 여배우들에게 문을 열어주게 됐다는 점이 특별하다”면서 “그동안 무대에서 흑인 여성이 아름다움, 힘, 우아함을 보여주면서 두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역할을 맡긴 어려웠다는 점에서 크리스틴 역할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또 세인트루이스는 “웨스트엔드에서 배우로 데뷔할 때 ‘라이온킹’ ‘드림걸스’ ‘컬러퍼플’ 등의 흑인 캐릭터로 출연할 것이라고 들었다. 이 작품들 자체는 훌륭하지만, 스테레오타입화 된 역할 대신 도전할 수 있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현지에선 이번 사례를 기점으로 특정 이미지에만 갇혀 있던 무대 위의 흑인 배역에 다양성이 추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해외 공연계에서는 물론, 국내에서도 남녀불평등 등 편견을 없애고 캐스팅의 다양성을 품으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광화문연가’ ‘오펀스’ ‘햄릿’ 등 다수의 작품들에서 배우의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젠더프리’(혹은 ‘젠더블라인드’), 기존의 성을 뒤바꾸는 ‘젠더벤딩’ 캐스팅이 이어지고 있다.
뮤지컬에서는 201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남성들만 맡아 왔던 헤롯 왕 역할에 여성 배우가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이 같은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2018년 초 미투 운동의 등장으로 공연계의 남성 중심적 사고가 옅어지면서 더욱 확산하고 있다.
국내에서 젠더프리. 젠더벤딩 캐스팅을 활발하게 도전하고 있는 배우는 차지연이다. 그는 ‘아마데우스’ ‘더 데빌’ ‘광화문연가’ 등에서 남자 캐릭터를 연기하거나, 성별을 부여하지 않아도 되는 캐릭터들에 잇따라 캐스팅 되면서 화제를 모아왔다.
차지연은 최근 진행한 화상 인터뷰를 통해 “배우로서는 큰 행운이다. 쉽게 도전할 수 없고, 상상하거나 가능성도 생각하지 못할 법한 작품들에 출연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말했다. 다만 여전히 성별에 대한 편견도 존재한다. 차지연은 이 편견을 넘는 것이 배우, 제작진의 과제라고도 말한다. 그는 “될 수 있으면, 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과유불급이라고 ‘굳이 이걸 꼭 여성이 했어야 했나’라는 위험성이 있는 것들은 심도 있게 오래 생각을 한다. 작품과 따로 노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연습에 매진했고, 어떻게든 공감이 가는, 설득력이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전했다.
지난 7월 28일 ‘광화문연가’ 프레스콜에서도 그는 업계의 다양성 관련 시도들에 대해 “많은 여자 배우들이 좋은 작품을 발견했을 때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도전할 기회가 많아지는 시대가 열렸다. 그것이 남자, 여자라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다양한 각도로, 서로가 많이 협력하는 시대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성별에 상관없이 좋은 작품, 역할이라면 누구나 욕심내고, 누구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선의의 경쟁이다. 작품 자체의 퀄리티도 높아지고 관객들의 만족도도 높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