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결정적 장면㉛] 현빈 역 여현수가 밝힌 ‘번지 점프를 하다’
22년 전 개봉한 김대승 감독의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는 센세이셔널하다(sensational+하다,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논란을 일으킬 만하다)라는 단어에 딱 들어맞는 영화였다.
사랑은 문학과 음악과 미술과 모든 예술로부터 사랑받는 영원한 주제여서 이제 100년을 넘은 역사(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의 젊은 예술, 영화도 사랑을 탐구하고 탐닉해 오고 있다.
원수 가문 사이에서 사랑이 피어나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사랑이 싹트고,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던 사랑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제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변치 않고, 시간을 돌고 돌아 찾아왔다. 시간과 공간과 사회적 벽을 넘고 허물던 사랑은 성적 소수자들의 사랑에도 시선을 두고 있다. 현실의 평균적 의식보다 최소 반보 앞서 걸으며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심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감독 김대승, 각본 고은님, 제작 눈엔터테인먼트, 배급 브에나비스타코리아·이언픽쳐스)는 사랑의 본질에 관한 숙제를 누구보다 열심히 한 작품이다. 1983년, 82학번 서인우(이병헌 분)는 같은 학번 미대생 인태희(이은주 분)에게 첫눈에 반하는 설렘부터 징글징글한 싸움까지 깊은 그리움이 드리우는 사랑을 한다. 사실 태희도 인우에게 반했고, 그래서 먼저 인우의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다. 입대로 인한 잠시 이별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입영열차가 떠나는 용산역에서 보기로 했는데 태희가 나오지 않았다. 실은, 용산역으로 오던 길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해 오지 못했다.
17년이 지나 2000년, 인우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돼 있다. 한 학생이 자꾸만 눈에 띈다. 무언가를 들 때 새끼손가락을 펼치는 버릇도, “젓가락은 시옷 받침인데 왜 숟가락은 디귿 받침이냐고” 묻는 것도,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을 좋아하는 것도 태희와 똑같다. 태희일 리 없다. 그는 이제 열여덟 살, 고2 학생 임현빈(여현수 분)이다. 태희의 얼굴이 새겨진 라이터를 가지고 있는, 그는 누구일까.
현빈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남학생이다. 여학생에게 관심이 가고 학교 성적보다 남자들끼리의 우정이 중요한 평범한 친구다. 국어 선생님이 좋은데 그와 가까워질수록 여자친구 이혜주(홍수현 분)와도 남자친구들과도 멀어지는 게 혼란스럽다. 또래 집단이 중요한 시기, 자신을 태희의 환생이라 믿는 선생님의 지나친 호감 표현에 동성애라는 놀림을 받자 현빈은 친구들 쪽을 택하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너는 왜 나를 못 알아보느냐”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선생님에게서 진심이 느껴지고, 혜주와 잘 지내보려 하는데 마음이 거꾸로 달려 학교를 뛰쳐나간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현빈에겐 어떤 기억이 떠올랐고 이번엔 무사히 용산역에 도착한다. 학생에 대한 부적절한 행동으로 파면된 인우와 그곳에서 만난다. 둘은 태희와 인우의 약속대로 뉴질랜드로 번지 점프를 하러 떠난다.
지난 22일 현빈 역의 여현수를 만났다. 사전 약속이 있던 게 아니었는데 우연히, 20년이 더 된 영화를 출연 배우와 되짚어 볼 수 있는 흔하지 않은 행운을 만났다. 배우 현빈이 데뷔하기 전 우리에겐 ‘번지 점프를 하다’의 ‘현빈’만 있었다며, 어쩜 ‘태희’까지도 미남 미녀 배우 이름이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냐며, 영화의 선견지명 작명부터 가볍게 시작했다.
늘 궁금한 게 있었다. 여현수는 만 18세에 영화를 촬영했다. 미성년 나이에 이해하기엔 쉽지 않은 주제 의식, 인물과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연기했을까. 그의 답은 솔직했다. 현재 마흔의 나이에서 당시 영화를 바라보며 깊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때 그 마음으로 담백하게 말했다.
“현빈이가 태희의 환생이라고 어느 분도 말씀해 주지 않았어요. 저 또한 그렇게 파악하지 못했고요. 현빈이가 느끼는 그대로 저도 영화를 따라갔던 것 같아요. 저 선생님 좋다, 근데 선생님하고 친해지니까 친구들하고 멀어지는 게 싫어서 선생님을 밀어낸다, 그런데 분명 좋은 사람이어서 선생님을 싫어할 수 없다. 작품을 깊이 알고 연기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장면 장면 또 현빈이 감정에 집중해서 표현했어요.”
그래서 잘못이 아니다, 그게 맞다. 덕분에 현빈의 순수한 끌림과 갈등과 방황과 탈출이 날 것처럼 보였다. 그걸 알기에 김대승 감독도 어린 여현수에게 속속들이 설명하지 않는 방식의 연출법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다 기억이 떠오른 거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선생님 얘기를 믿게 된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태희라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저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 거죠.”
또 궁금한 게 있었다. 마지막 장면. 혹자는 태희와 인우의 번지 점프로 보고, 혹자는 현빈과 인우로 본다. 개인적으로 후자다.
“저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해석의 여지가 있고 논란이 있는 영화에 제가 출연했다는 게 너무 좋아요. 어릴 때는 제가 다른 연기를 하고 다른 작품을 해도 ‘번지 점프를 하다’ 얘기만 하니까 속상하기도 하고 배우로서의 성장을 막는 일면이 있다고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저를 기억해 주시는 작품이 있다는 게 감사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서 지금도 얘기 가능하다는 게 더욱 감사해요. 어느 쪽인가는 보시는 분 마음에 달린 것 같고요.”
여현수는 즉답을 피하는 대신, 마지막 장면에 임하던 마음가짐에 관해 얘기했다. 바로 이 장면이다.
현빈: 이번엔 여자로 태어나야지.
인우: 근데, 나도 여자로 태어나면 어쩌지?
현빈: 그럼, 또 사랑해야지 뭐.
“눈빛을 세 번, 서로 예쁘게 주고받아야지, 아름답게 나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우리 영화는 껍데기를 넘어선, 껍데기 너머의 사랑을 얘기하는 거잖아요. 당신이 어떤 껍데기를 쓰고 있든 같은 영혼이라면 당신을 알아보고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결국 사랑은 그 사람의 무엇도 아닌 영혼을 사랑하는 거라는, 이 엄청난 얘기를 눈빛과 표정과 분위기만으로도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고2 학생 임현빈일 때와 학교를 나와 번지 점프대에 선 현빈이 달랐듯, 영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주제 의식을 심화한 배우 여현수의 책임감이 그날의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태희와 인우일 때는 괜찮다가 현빈과 인우로 만나니 세상은 돌을 던졌다. 두 사람은 갈 데가 없었고 벼랑 끝이 끝이 아니길 바라며 번지 점프를 했다. 하기 전 나누는 마지막 얘기. 어려서 더욱 상처가 컸을 현빈이 말한다, 내가 여자로 태어나면 그래서 남자인 너와 만나면 우리가 세상 안에서 사랑할 수 있겠지. 좀 더 살아서 운명의 얄궂음을 아는 어른 인우가 말한다, 너뿐 아니라 나 역시 여자로 바꿔 태어나 또 같아지면 어쩌나. 순수한 자에게 해답이 있다. 무슨 상관, 그럼 또 사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