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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41>] 백일음주


입력 2022.09.22 14:01 수정 2022.09.22 09:54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41화 백일음주


방선희가 내놓은 해장술로 적당히 속을 다스린 후 이철백과 한종탁은 모텔 옥탑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둘은 가는 길에 사들고 간 맥주 다섯 병을 옥탑방에서 깨끗이 비운 다음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한종탁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철백은 일하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창밖엔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휴대폰은 전원 자체가 아예 들어와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노지연에게서 바리바리 걸려오던 전화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는데 아마 그때부터 전원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한종탁은 노숙인처럼 추레한 몰골로 털레털레 집을 찾아 들어갔다.


“안 죽고 살아 있네?”


노지연이 아들과 함께 저녁을 먹다가 담담한 눈빛으로 한종탁을 쳐다보았다. 한편으론 안도의 기색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아, 미안하다. 나는 안 돼. 내가 감히 술을 이기려하다니,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한종탁이 기죽은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굳이 비굴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지 않아도 녹초가 된 몸은 알아서 비굴해져 있었다.


“그 동안 어디 있었어?”


“술 취해 친구 집에서 하루 종일 잤다.”


노지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종탁이 뒤따라 들어가 제대로 반성하는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진짜 끊어야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노지연이 못 들은 척 아무 말도 없었다. 한종탁은 이번엔 목소리를 조금 높여 ‘진짜 끊을게’ 라고 말했다. 그래도 노지연이 아무 말 없자 한종탁은 언제 기가 죽어있었냐는 듯 제법 목청을 높여 말했다. 진짜라니까? 마지막으로 속는 셈치고 한번만 더 믿어주라.


“아직 한 달 안됐어.”


노지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한종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음주행각이 용서된 것도 그렇지만 당장 술 끊으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한종탁은 하루를 건너뛴 바로 그 다음날 퇴근하면서 가볍게 한잔하고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 말해도 알아서 술 끊겠지 했는데, 그래 좋다. 이제 보름 남았으니 그 안에 결판내라. 보름 후에도 술을 못 이기면 평생 못 마실 테니까.”


노지연의 말투엔 사랑스럽게도 애증이 듬뿍 묻어있었다.


그리고 닷새가 지난 목요일, 팀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한종탁은 회식자리에서 끌로 심장을 긁듯 명심하며 소주를 삼켰다. 절대 발동이 걸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무리 마셔도 발동이 걸리지 않는 정신자세를 만들어 놓아야 했다. 하지만 술 앞에 장사 없다고, 맹세는 결국 마음뿐이었다. 한종탁은 시나브로 발동이 걸려 그날 밤도 지인을 찾아다니며 술을 퍼마셨다. 이튿날 출근시간이 될 때까지 세상모르고 잠을 자던 한종탁은 화들짝 놀라 일어나 세수만 하고서 집을 나섰다. 백일기도한답시고 선언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백일기도 아니라 백일음주를 수행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회사에 지각해서 직원들 눈치를 봐가며 앉아있으려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메슥거리는데 설상가상으로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오전부터 사무실을 비울 수 없어 약 먹은 닭처럼 꾸벅거리며 힘겹게 자리를 지켰다. 점심을 먹고 나면 좀 나아지려니 했지만 웬걸 몸은 점점 더 파김치가 되었다. 한종탁은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고 승용차에 숨어들어가 얼마간 눈을 붙였다.


오후 늦게 한종탁은 노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지연이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한종탁은 진짜로, 완전히, 평생, 술을 끊겠다고 강조했다. 노지연이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한종탁이 재차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노지연은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다. 퇴근해서는 더욱 맹렬하게 빌었다. 잘못했다고. 진짜. 완전히 평생 술을 끊겠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빌었다. 노지연이 귀찮은 듯 방에 들어가 등을 보이고 누웠다. 한종탁은 따라 들어가 빌고 또 빌었다. 그러자 노지연이 손을 훠이 내저었다. 이제 그만 귀찮게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애원이 먹힌 것 같아 한종탁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자 그동안 못 느꼈던 피로가 몰려왔다. 한종탁은 저녁을 먹고는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기도한 지 일주일 됐어.”


기도하는 동지가 한 사람 생겼다. AS팀장 강이었다. 강 팀장 역시 한종탁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술꾼이었다. 강 팀장은 지지난주 일주일 내내 잇달아서 마셨다가 결국 술을 끊게 되었다고 했다.


“진짜 아파서 병가를 내어도 술 먹고 안 나온 줄 알아. 자존심 상해서 술 끊어버렸다.”


“그게 우리 술꾼들의 비애죠.”


“모든 게 술로 귀결돼.”


강 팀장은 어떠한 변명도 명분도 통하지 않고 모든 게 술로 귀결되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이번 참에 아주 확실하게 술을 끊기로 작심했다고 한다. 누구보다 제일 기뻐한 아내가 가장 든든한 후원자라는 것이다. 게다가 현대의학의 도움도 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주는 약은 보조제에 불과하고 가장 관건은 본인의 의지라는 걸 강 팀장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 내가 빠삭한데,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어.”


강 팀장은 금주전쟁에서의 승리를 자신했다.


“우리 함께 오래토록 기도합시다. 강 선배나 나나 술 안 마시는 것만큼 가족에게 큰 선물은 없어요. 물론 우리가 술을 안마시면 술꾼들이야 안 좋아하겠죠. 그렇다고 또 술을 마시면 사람들이 학을 떼잖아요. 큭큭.”


한종탁 역시 에둘러 강 팀장을 응원해 주었다. 그렇게 현대의학의 도움까지 받는다며 강 팀장이 큰 소리를 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한종탁이 출근해서 보니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강 팀장의 모습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뭐랄까, 밤새 집에 들어가지 않고 사우나에서 곧장 출근한 술꾼의 포스랄까. 불현듯 그렇게 생각한 자신이 불경스럽게 느껴져 한종탁은 의구심을 떨치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강 팀장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며, 가족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승리하겠노라며 굳은 결의에 큰 소리까지 뻥뻥 쳐댄 게 한 달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니고 불과 사흘 전이었으니까. 아울러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는 술꾼끼리 서로를 의심하는 비극은 없어야 한다는 게 한종탁의 평소 지론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종탁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강 팀장의 자리로부터 반경 3미터 안에 들어서자 홍시 냄새가 솔솔 났다. 강 팀장은 가늘고 길게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개 코가 아니라도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한종탁은 혹시나 자신의 코가 잘못된 건 아닌지 정말로 강 팀장이 술을 마셨는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선입견으로 미리 재단해버리고 싶지 않았다.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진짜로 강 팀장이 홍시를 먹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한종탁은 긴장감을 가지고 반경 1미터 이내까지 바짝 다가갔다. 마치 불발탄을 해체하려고 접근하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한종탁은 왜 사람들이 강 팀장과 술을 항상 실과 바늘처럼 세트로 대하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강 팀장은 동공이 많이 풀린 상태에서 비굴하다싶을 정도로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불과 사흘 전만 해도 술꾼의 어떠한 변명도 들어주지 않고 모든 걸 술 탓으로 낙인찍는 부조리한 세상에 술을 끊어서라도 저항하겠다던 금주투사의 당당한 기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한종탁은 속절없이 기도 동지를 떠나보내고 한 동안 콧속을 맴도는 홍시 냄새에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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