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46화 문학의 힘
“그럼 술은 어떠니. 너 술 좋아하니까 소재는 충분할 거잖아. 내가 제공해 줄 수도 있고.”
“술이라.”
순간 은빛 섬광이 번개처럼 번쩍이며 이철백의 뇌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술은 김석규의 주장에 따른 반작용으로 이철백이 요사이 움켜지고 있는 화두였다. 술만큼 삶의 활력이 없고 휴식이 없고 낭만이 없는데 술을 마치 마약처럼 죄악시하는 것은 결코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잘 마시면 그만큼 좋은 음식이 없는데, 잘되면 내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막말처럼 자신이 잘못 처먹고는 무구한 술을 탓하는 형국이었다.
“그럴까? 술이라면 나도 자신 있지. 주위에 널린 게 술꾼들이니까.”
이철백은 꽉 묶인 매듭 하나가 시원하게 끌러지는 기분을 느끼며 맥주를 쭉 들이켰다.
이튿날 회사에 나가기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난 이철백은 편백나무 숲의 피톤치드를 잔뜩 들이키기라도 한 것처럼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새벽잠을 떨치지 못해 지끈거리던 두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연일 찌뿌둥하던 몸은 새털처럼 하염없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어떤 알 수 없는 에너지를 받은 듯 힘이 넘쳐 나고 둥실둥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황홀한 기분마저 들었다. 누구는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어있더라’며 놀라워했는데 이철백 역시 밤새 하늘의 별과 달의 기운을 듬뿍 받은 것 같았다. 이철백은 딱딱한 택시 핸들이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변하는 놀라운 마법을 직접 손으로 느끼며 일하는 내내 눈가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 모든 게 문학의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문학을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몸에서 명현반응이 일어나는 것에 감격한 이철백은 정녕코 글을 써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자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몸은 비록 문학과 관련이 없는 택시운전을 하고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있다는 기이한 의욕과 보람 같은 것을 느꼈다. 사람이란 자신과 궁합이 맞는 일에 몰입하게 되면 광기에 휩싸이기도 한다는데 이철백에게 에너지를 주는 일은 바로 문학인 것 같았다.
이철백이 운전을 할 때, 혹은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실 때, 심지어 꿈을 꾸면서도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장르와 구성이었다. 형식을 에세이로 할지 소설로 할지, 제재는 어떤 것을 가져올지, 가령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나 역사적 사실을 취할 때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것 위주로 갈지 아니면 조금 충격적이고 그로테스크하게 꾸밀지, 그것도 아니면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을 부각시켜 술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지. 고민을 거듭하던 이철백은 술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역할일랑 김석규의 몫으로 남겨두고, 자신은 술과 함께한 유쾌하고 즐거운 상상을 마음껏 펼치고 싶었다. 이제껏 술을 마시면서 겪었던 재미있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잘 버무리기만 해도 한편의 성공적인 술꾼 보고서가 탄생하리란 생각이었다.
그러자 문득 ‘왕과 나’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타일랜드의 샴왕과 영국의 미망인 안나와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영화였는데 이철백이 떠올린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제목이었다. 감나무 가지에서 감을 똑 따내듯 영화 ‘왕과 나’에서 제목을 똑 따서 ‘술과 나’로 짓고 싶었다. 이철백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쌓아온 술에 관한 이력, 에피소드, 철학 등을 엮어보는 것도 괜찮을 성 싶었고 만약 분량이 단행본에 미치지 못하면 김석규와 한종탁 등 탁월한 술꾼들을 끌어들여 집필을 맡겨도 될 것 같았다.
며칠 후 이철백은 퇴근길이라던 한종탁을 블랙&화이트로 불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자신이 구상한 집필계획을 한종탁에게 들려주고 자문을 받을 작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종탁의 에피소드도 몇 건 취재할 생각이었다.
“좀 약해. 그래 가지곤 책 내기도 힘들고, 낸다 해도 독자 구하기 어렵겠어.”
한동안 이철백의 구상을 듣고 난 한종탁이 모질게 잘라 말했다. 한종탁은 지역문예지 소설 신인상을 수상한 김석규에게 자극받아 몇 해 전 두문불출하면서 장편소설 하나를 완성하여 여러 출판사에 투고한 적이 있었는데 모조리 거절당하고 한 군데에서 자비 출판 운운하자 자신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며 딱 절필을 하고 말았다.
“철백이 네가 유명인사도 아니고, 술꾼들에겐 흔한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낼 필요 있겠냐?”
한종탁의 직설적인 말에 이철백은 쑥스러워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요즘 트렌드가 신변잡기적인 글이잖아요. 술꾼이 적나라하게 고백한 술꾼 보고서, 술과 나.
제가 보기엔 괜찮은데요. 술꾼이라는 확실한 독자층도 있구요.”
방선희가 발끈하며 반론을 제기했다. 이철백의 집필을 종용한 원죄를 가지고 있어 그런지 한종탁의 낯 뜨거운 면박을 보고도 모른 척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런 신변잡기들이 출판 홍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독자도 없고 발표할 가치도 없는 그런 필요 없는 책들이 출판 수준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독자들을 출판시장에서 내모는 격이 되지요.”
“물론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는 그런 책들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렇다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책을 내는 사람이 따로 정해진 건 아니지. 독자에게 필요 없는 책이라 했는데 그렇다고 독자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니잖아. 해를 끼친다면야 당연히 내지 말아야지. 하지만 무해하다면 그걸로 무방한 거 아냐? 우리가 하는 행위 중에 꼭 필요한 것만 가려낸다면, 안 해도 되는 것 쓸데없는 건 또 얼마나 많겠냐. 그런 걸 다 금지시킨다고 해보자. 그럼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겠어. 누가 나에게 세상에 필요 없는 책이라고 힐난한다 해도 나는 그게 무의미한 책이라고는 보지 않아. 작자는 그걸 쓰면서 스스로 위안 받고 힐링 되고 자존감 느낄 수도 있거든. 그럼 그걸로 된 거 아니니?”
이철백이 며칠 동안 글을 쓰기 위해 구상하면서 다졌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소환해 내듯이 야무지게 말했다. 이번엔 한종탁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출판사에서 퇴짜 맞은 일을 툭툭 털어내지 못하고 한종탁은 글에 관한 한 필요 이상으로 의기소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종탁이 짐짓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맥주잔을 치켜들고 건배를 제안했다.
“좋아. 글을 쓴다고 쳐. 그럼 출판비는 있냐? 그 정도 원고를 받아줄 출판사는 없을 테니까.”
한종탁이 여전히 까칠하게 말했다. 그러자 방선희가 출판비용은 자기가 책임지겠으니 염려 말라고 호언장담했다. 방선희는 재차 돈 걱정, 출판 걱정 하지 말고 글이나 잘 써보라며 이철백을 격려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