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3.1운동이 일어난 원인 중의 하나는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있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 퇴위 당하였고, 이후 사실상 덕수궁에 유폐되었다. 이곳에서 고종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가족과 극히 일부의 사람들 뿐이었다. 고종은 일제의 감시하에 거의 정해진 일과를 보냈기에 함녕전에서 맞이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일본이 관여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충분히 합리적이었다.
고종은 새벽 3시쯤 잠들었다가 오전 11시쯤 일어났다. 고종이 일어나면 전의실에서 간식으로 귤홍과 생강, 작설 등을 달여 꿀을 탄 차와 귀용탕 등을 다려서 올렸다. 오후 1시 반쯤에 점심 수라를 들었다. 이후 이왕직 장관이나, 일본에 인질로 잡혀 있는 이은의 전보 등을 읽거나 답장을 보내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 4시쯤에는 가미양위탕을 마셨다. 오후 6시 반쯤에는 저녁 수라를 들었다. 오후 7시에는 선원전, 경효전, 의효전의 전사보들이 왕실의 묘우나 능침을 살피고 점검한 결과를 보고하였다. 8시쯤에는 차 한 잔을 들었고, 밤 10시쯤 야식을 들었다. 그리고 새벽 3시쯤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처럼 함녕전에서 고종이 하는 일은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1911년 후궁 엄씨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더욱 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그 다음해 복녕당 양씨로부터 덕혜옹주가 태어나면서 고종의 일과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고종은 복녕당에게 가서 산모와 아기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함녕전으로 돌아왔다. 이후에 이육과 이우 등이 태어났다. 고종은 아이들을 함녕전에 데려왔고, 후궁과 함께 이들이 낳은 아이들을 돌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고종의 공간은 함녕전과 그 주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넓게 보아도 덕수궁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다만, 고종은 일주일에 서너 번 오후 2시쯤 함녕전에서 나와 4시까지 운동을 하였다. 고종이 즐겨하는 운동은 옥돌이었다. 함녕전에서 도보로 대략 3km가량 떨어진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설치된 옥돌장까지 운동을 다녔다. 옥돌이란 당구를 의미하였고, 동행각에 설치된 옥돌장은 일본에서 들여온 당구대를 설치한 곳을 의미하였다.
며칠 동안 따뜻했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19일에는 낮에도 영하 15도까지 기온이 떨어졌다. 여기에 강한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더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2시쯤 창덕궁의 옥돌장에 가서 운동하고 4시쯤 함녕전으로 돌아왔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고종의 건강 이상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고종은 지금까지 습관처럼 새벽까지 깨어있었다. 평소에도 새벽 3시쯤 잠들었기 때문이다. 평소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던 고종은 당시에도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새벽 1시 30분을 전후하여 고종이 뇌일혈로 의심되는 경련이 발생하였다. 고종의 일상과 행사를 시간대별로 기록한 <덕수궁찬시실일기>에 따르면 고종이 병증이 발생하자, 근무 중이던 사무관 한상학은 2시 35분에 의관에게 전화로 연락하였다. 연락을 받은 의관이 함녕전에 들어온 것은 4시 20분이었다. 순종이 함녕전에 도착한 것은 6시 30분이었다. 하지만 순종은 고종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였다.
일본 측 발표대로 고종의 사인을 뇌일혈로 본다 해도 발병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죽음에 이르는 것은 당시 의학적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창덕궁까지 당구장까지 다녀온 것에 대해서도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는 건강한 것으로 볼 수도 있었고, 갑작스럽게 추운 날씨에 외출한 것이 뇌일혈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여기에 초기 대응 역시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경련 후 3시간이 지나서 도착한 의관 및 일본 여의사 등과 대화를 나누었다. 즉 발병 이후에도 비교적 의식 상태가 좋아 의사와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반응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비록 후유증으로 이른바 ‘풍’이라고 부르는 마비 증세가 올 수 있지만, 생존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당시에도 의학적 상식 수준에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순종이 도착하기 전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심지어 이후 작성된 <순종실록> 등과 기록상 차이가 있다. 이러한 문제는 당시 국제 정세 등 여러 가지 요인과 맞물려 고종의 사인에 대해 의문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결국 고종의 죽음에 대한 의심은 일제의 지배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3.1운동의 촉매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