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피카' '안나 카레니나' '홍련' '말벌' 등 잇따라 개막
창작극부터 고전 재해석까지 장르·소재 경계를 허물다
"특정 성별 이야기 넘어, 보편적 인간사 그리는 주체로"
최근 공연계에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잇따라 개막하고 있다.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창작극부터 고전까지 장르와 소재의 경계를 허무는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이 같은 흐름은 뮤지컬 ‘렘피카’ ‘안나 카레니나’ ‘홍련’ ‘A여고 사서의 영광과 비극’, 연극 ‘말벌’ ‘정희’ 등이 그 예다. 과거 천편일률적인 남성 캐릭터 위주의 극에서 벗어나 여성 주체, 젠더프리 캐스팅 등 무대 위 다양성을 추구해 온 흐름의 연장선으로 분석된다.
뮤지컬 'A여고 사서의 영광과 비극' ⓒ홍컴퍼니
이 가운데 올해 초연되는 작품들은 공연의 성격과 캐스팅 구조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보인다. 그동안 대학로 소극장 무대는 남성 배우 중심의 2~3인극이 주류를 이뤘다. 이 같은 환경에서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A여고 사서의 영광과 비극’은 보기 드문 여성 4인 서사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1990년대 여고 도서부를 배경으로 사라진 문학 선생님의 흔적을 쫓는 네 여학생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여성 배우들에게 더 많은 무대와 입체적인 배역을 열어주겠다는 창작진의 의지를 담고 있다.
과거의 여성 서사가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 등 여성으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면, 현재는 여성의 입과 캐릭터를 빌려 시대의 보편적 사회 문제와 다채로운 인간사를 논하는 추세다. 여성 서사가 단지 여성만의 이야기나 젠더적 특수성에 머물지 않고 그 스펙트럼이 한층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의미다.
지난 8일 초연의 막을 올린 연극 ‘말벌’은 20년 만에 재회한 고교 동창생 헤더와 카알라의 대화를 그리는 심리 스릴러를 표방하며 여성 중심 서사의 스펙트럼 확장을 보여준다. 극은 전통적인 선하고 희생적인 여성상을 비튼다. 부유하지만 내면이 무너진 인물과 빈곤 속에서 거칠게 생존하는 인물을 대치시켜, 학창 시절의 폭력과 트라우마, 사회적 계급 격차가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파헤친다.
연극 '말벌' ⓒ해븐프로덕션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스핀오프 연극인 ‘정희’ 역시 궤를 같이한다. 후계동 술집 주인 정희의 독립된 이야기를 다루는 이 극은 중년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고립감과 묵은 감정의 균열을 마주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거창한 영웅적 서사가 아닌 평범한 개인의 미세한 심리 변화를 통해, 현대인의 고독과 치유라는 보편적인 정서로 관객의 공감대를 넓힌다.
역사적 격랑 속 개인의 욕망을 조명하며 서사의 층위를 높인 작품도 있다. 오는 21일 개막하는 뮤지컬 ‘렘피카’는 20세기 초 아르데코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의 일대기를 다룬다. 러시아 혁명과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생존과 예술적 성취를 향해 돌진하는 개인의 야망을 그린다. 여성의 서사를 시대의 생존 투쟁과 예술가의 맹렬한 욕망이라는 담론으로 끌어올린 사례다.
뮤지컬 '홍련' ⓒ마틴엔터테인먼트
고전 속 수동적이었던 여성 캐릭터를 주체적인 인물로 재해석하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뮤지컬 ‘홍련’은 전통 설화 ‘장화홍련전’과 ‘바리데기’를 바탕으로, 우정과 연대를 통한 치유의 과정을 저승 재판이라는 독창적인 형식으로 풀어냈다. 이 과정에서 두 여성 홍련과 바리는 서로를 통해 내면의 아픔과 트라우마를 직접 마주하고, 이를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애도한다. 그리고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니 부디 자신을 용서하라’고 현재를 살아가는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톨스토이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주인공 안나를 단순한 불륜이나 비극적 로맨스의 희생양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보수적인 러시아 귀족사회 속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자 그에 따른 책임을 짊어지며 주체적인 선택을 내리는 한 인간의 선택에 집중한다. 1막의 막바지를 장식하는 ‘자유와 행복’이 가사가 이 같은 안나의 선택과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넘버다.
한 공연 관계자는 “소재와 장르 그리고 스타일 등 여성 서사를 다룸에 있어서 그 활용이 다양화되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며 “무대 위에서 여성 캐릭터의 쓰임이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성 서사극이 특정 성별의 이야기를 넘어 보편적 인간사를 그려내는 주체가 됐다는 건 공연계가 성취한 가장 유의미한 다양성”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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