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에 타고 있는 당신, 지금 꼬리칸인가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s@hanmail.net)

입력 2013.08.02 09:44  수정 2013.08.02 09:53

<김헌식의 문화 꼬기>시스템 극복이라는 영원한 화두

아래 칼럼의 내용 일부에는 영화의 결말을 암시하는 부분이 들어있으므로 스포일러를 피하시려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편집자 주>

일제 36년, 친일파들은 설국열차의 동조자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열차 밖은 열강의 냉혹한 칼날이 노리고 있는 설국이었기 때문에 열차에서 이탈하지 않는 게 생존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 열차 시스템에 오른 이들은 자발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열차에 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위치는 마지막 칸이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전진은 불가능 했다. 제일 맨 밑바닥 조센징이었다. 그들에게 열차는 생지옥이었다. 서로를 잡아 뜯어먹어야할 상황에 이를 정도로 비참했다. 3.1만세 운동이 일어나니 문화정치를 시작하고 리더들을 중용했다. 반란은 하나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결국 그들은 시스템에 녹아들어갔다.

식민지 열차의 시스템은 마지막 칸에 있던 이들의 모든 자원을 다가져가고 나중에는 청년도 소녀도 빼앗아 갔다. 성노예로 징용,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일제 식민지안의 리더가 누구인지, 성공하는 기회를 많이 조센징에게 많이 주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일제 식민지를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경성제국대학을 나와 식민지 상위층으로 올라간 이들은 본래 식민지 시스템이 끝나면 생명을 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조선인임에도 그들은 오히려 식민 체제를 지키기 위해 앞장선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꼬리 칸의 저항군 리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열차의 맨 앞 엔진을 장악하려 한다. 엔진을 장악해야 차별과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참했던 열차 보안 설계자였던 남궁민수(송강호)는 엔진실로 들어가는 문은 열지 않으려 한다.

그는 반란의 지도자는 시스템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하는 메커니즘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커티스도 역시 흔들린다. 대신 그가 부수려는 문은 엔진 실이 아니라 열차 밖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남궁민수가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꼬리 칸도 엔진 실도 아닌 열차 자체였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설국열차' 스틸 컷.ⓒ모호필름

열차 자체를 폐기 하려는 이들은 자칫 꼬리 칸 사람이나 엔진실 사람 모두의 공격을 받기 쉽다. 그런 면에서 둘은 같은 공통의 존재들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갑을을 다투는 이들은 자기가 갑이 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그 갑을병정을 만들어낸 근본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있다.

생존 경쟁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주 물어본다. 체제 순응과 계승이냐 체제 거부와 자유 쟁취인가, 달리 말하면 시스템 안에서 1%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 시스템 즉, 열차를 버릴 것인가. 폭주하는 세계경제 시스템에서 꼬리 칸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시스템 밖으로 탈출을 감행할 것인가.

어쩌면 80년대 화두를 들고 나왔다. 낡은 화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화두로 고민하는 모습은 오래된 미래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2031년 미래 인류 멸망 이후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낡은 것 같은 화두가 계속 될 것이라는 예견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누이트'처럼 살 수만은 없다. 그런 삶을 모두 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누이트도 문명과 완전히 단결된 채 살고 있지 않다. 커티스의 혁명이 성공하기까지 18년이 걸렸다. 일제 36년은 그보다 길었다. 그들은 조선이 해방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되었다.

조선 왕조 열차 체제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들은 신분 해방이 이루어지기까지 600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수많은 이들은 그 열차에 저항했지만, 열차 밖을 향한 것인지, 영차 엔진을 향한 것인지 논란이 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빙하가 녹는지 안 녹는지 남궁민수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는 날카롭게 그 지역들을 찾아낸다. 적절한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7인의 반란처럼 얼어붙고 만다. 거꾸로 그들의 모습은 적절한 타이밍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무엇보다 남궁민수는 본인은 비록 희생되더라도 자신의 몸을 커티스와 같이 던졌다.

자신의 미래 아이들을 위해 그렇게 자신을 던지는 이들은 미래에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식민지 열차에서 친일파로 호의호식할 때, 일제 36년 동안 독립운동을 계속 했던 이들이 있었고 민주화와 반독재를 위해 투쟁했던 이들도 있었다. 식민지와 독재 시스템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말이다.

윌 포드(에드 헤리스)도 처음 무한 열차를 만들었을 때, 기존의 시스템을 가로지르는 사람이었다. 그 시스템이 있었기에 꼬리 칸이 가능했고 새로운 희망을 그래도 키울 수 있었다. 시스템 안에서 그날을 기다리며 새로운 날을 기다릴 것인가, 아님 시스템에서 즐길 것인가. 모든 시스템은 언제인가는 멈추게 되어 있다.

그 순간이 와도 그것을 숨기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도한 짓을 하는 이들도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에 있다. 열차의 꼬리 칸에서 열악하게 매달려 갈 것인가 앞 칸에서 호의호식하기 위해 참살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 아님 열차 밖의 더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가기 위해 적절한 타이밍의 준비를 할 위치에 있는가.

글/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