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한방으로 팔자 고치려다 집권 멀어져
국정원 댓글 의혹은 공분 아닌 정파적 분노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민주당이 장외투쟁으로 여간 고생이 아니다.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국회 차원의 국정원 개혁,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서울시청광장에 천막당사까지 설치하고 시민들의 지지와 참여를 독려하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이 더운 날씨에 높으신 국회의원들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들 법도 하건만 별로 그렇지 않다. 내가 너무 모질어서 그런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왜 장외투쟁을 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해가 안 될까?
우선, 민주당의 장외투쟁이 워낙 뜬금 없어서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국정원 선거 개입을 조사하는 국정조사특위 운영과 관련하여 지난 7월 28일 합의를 했다. 여야는 8월 8일과 9일 청문회를 열고 8월12일까지 조사보고서를 작성해서 국정조사를 마무리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런데 7월31일 동행명령장 발부 문제를 이유로 느닷없이 판을 깨고 장외로 나갔다. 민주당은 새누리당에 청문회 증인 특히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 대한 동행명령장의 발부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다 관철되지 않자 장외투쟁을 선언한 것인데, 도무지 말이 안 된다.
동행명령은 증인이 '정당한 이유없이 불출석할 때' 비로소 발부되는 것이다. 출석할지 안할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동행명령을 미리 보장하라는 것은 국회증언감정법에 맞지도 않음은 물론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말이 안된다는 사실을 민주당이 모를 리 없다. 민주당 비주류(친노)가 7월 28일자 합의에 대하여 격렬하게 반발하여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김한길 대표체제가 결국 장외로 뛰쳐나갔다는 사실, 다 아는 일이다. 동행명령장 보장요구는 그저 7월28일자 합의를 깨기 위한 핑계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구실로 뛰쳐나갔으니 이해가 될 리 없다.
다음, 민주당의 장외투쟁은 대선불복 움직임에 동참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기에 공감을 사기 어렵다. 일부 대학생과 교수들이 국정원댓글사건을 들어 시국선언과 촛불집회를 벌이면서 “광우병 촛불이여 다시 한 번”을 외치고 있는데, 여기에 민주당 주류가 가세하려고 판을 깬 것임이 분명하다. 대선결과에 불복하려는 민주당 강경파에 밀린 것인데, 공감을 얻기 어렵다.
끝으로, 민주당의 장외투쟁에는 민주당의 “한방의 추억”도 작용한듯하다. 2004년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을 한 방에 날려 버린 추억, 2008년 이명박 정권을 한 방에 무력화시켜버린 광우병 촛불시위의 추억, 이 달콤한 기억을 어찌 쉽게 잊겠는가. 국정원 댓글 촛불로 박근혜 정부를 한 방에 날려 버린다면 얼마나 신나겠는가.
그러나 이는 달콤한 유혹일 뿐이다. 갑부가 카지노에서 많은 돈을 따가면 그 지배인은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라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는데, 그 갑부가 달콤한 기억으로 한방을 노리고 계속 카지노를 찾다가 결국 딴 돈의 열 배, 백 배 잃을 게 뻔하기 때문이란다.
한 방의 추억은 위험한 것이다. 그리고 한 방으로 팔자를 고칠 수도 없다. 민주당이 2004년 한나라당을 한 방에 날렸지만 2007년 대선의 승리자는 민주당이 아니었고, 2008년 광우병촛불로 이명박 정권을 KO시켰지만 2012년 대선의 승리자 역시 민주당이 아니었다.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국정원선거개입을 이유로 한 촛불이 훨훨 타오를 기미가 안 보이는데, 왜 그럴까?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분노는 공분(公憤)이 아니라 대부분 정파적인 분노이기 때문이다. 본인들은 공분이라고 주장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이번에 시국선언을 한 사람이나 촛불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2002년 대선에서의 3대조작사건(김대업의 병풍, 설훈 의원의 이회창 후보 20만달러 수수의혹, 이회창 후보의 부인이 기양건설 10억원 수수의혹)에도 동일하게 분노하고 시국선언이나 항의시위를 했다면 이번의 분노가 공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시국선언하거나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2002년에도 분노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공분이 아닌 정파적 분노에 일반 시민들이 동참할 리 없다. 촛불이 타오를 리 없는 것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 민주당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2007년 대선이야 그렇다 치고,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가 무엇인가. 야당으로서 투쟁력이 부족해서라고 보고 강력하게 싸우겠다면서 장외로 뛰쳐나간 듯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민주당이 2012년 대선에서 정권탈환에 실패한 것은 수권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이 민주당에 대한민국을 맡길 만큼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보여주지 못했으니 새누리당 정권이 마음에 안 들던 국민들도 선뜻 민주당 후보에게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2008년 12월 조선일보 칼럼을 통하여 민주당이 집권을 포기했는지 물었다. 당시 민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을 뿐 수권세력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에 이를 지적했던 것이다. 그 칼럼에 대하여 민주당 의원 몇 분이 크게 화를 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지만, 2012년 대선결과를 본 후에도 내 칼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지금 민주당의 행태는 2008년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장외투쟁이 효과가 있을지 여러 모로 분석할 것도 없다. 지금 때가 어느 땐가? 장외투쟁이란 게 국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비민주적인 상황에서나 효과적인 것 아니던가? 국회라는 링이 멀쩡하게 있는데, 관중석으로 내려와 링 위에 있는 상대 선수를 입으로 공격한다고 상대선수가 쓰러지겠는가? 이런 선수를 보고 잘한다고 관중이 응원할 리 있겠는가?
민주화된 사회에서 야당의 책무는 강경투쟁이 아니라 정부여당을 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수권세력의 면모를 과시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부`여당이 국정운영에 신중할 것이요, 야당을 지지한 국민들이 차기에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이다.
야당이 국정에 협조하면 여당에만 유리하다는 강박관념도 이제 버릴 때가 됐다. 여당에 유리하고 야당에는 더 유리하게 되는 국정이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상생이고 민주당의 집권전략 아니겠는가. 민주당의 장외투쟁, 더 늦기 전에 걷어치울 일이다.
글/이재교 세종대 교수·(사)시대정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