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침몰·배설 배신...'이순신'은 왜곡의 종결자?
2005년 3월 KBS 홈페이지는 항의성 댓글로 거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문제의 사이트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3월 5일과 6일 걸쳐 방송된 53∼54회분에서 거북선 침몰 장면이 노출되었고 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항의가 폭주한 것이다. 어떤 내용이었기 때문일까. 이순신은 최고 지휘관들이 참여한 가운데 거북선 진수식을 거행하는데 큰 사고가 난다. 수병 100여명과 거북선이 침몰해버린 것.
시청자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역사적 기록 유무 논란이 일었다. 거북선이 진수식 과정에서 침몰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면이 최근 방영되는 '다시 보는 불멸의 이순신'에도 재등장하고 있다. 논란의 여지가 여전히 있는데 왜 다시 등장시켰을까.
혁신적인 전투태세 완비라는 점에서 보았을 때 중요한 설정이고 이순신이 역경을 극복하고 해전승리를 이끌어내는데 극적인 중요성을 갖기 때문에 여전히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은 역사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충분히 있다.
이는 드라마 내부적으로도 모순적이다. 녹둔도 전투에서는 10여명의 병사가 죽었고 그것도 전투 중에 죽었음에도 이순신은 죽음의 위기에 처하고 자신도 극도의 고통 속에서 번민을 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입은 정신적인 상처 때문에 이순신은 부하를 절대 죽이지않기 위해 전라좌수영을 운영한다는 리더십 철학을 밝히기도 했다.
그것에 비해 진수식 가운데 수십명이 떼죽음을 당하고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 거북선의 망실에도 불구하고 거북선 건조를 추진하는 이순신의 결연한 모습이 등장한다. 사실 거북선의 침몰과 수십명의 사망자 발생은 파직의 대상에 해당한다. 이런 정도라면 실록에 기록되지 않을 수 없고 이순신은 회복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물론 픽션이 전제된 영상콘텐츠에 대해 사실만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있을까.
당시 예산도 그렇지만 시간적으로도 부족한 상황이 되었다. 어리둥절했다. 상상은 자유지만 대중 드라마는 그 기대치를 너무 벗어나면 반발감이 생김을 생각해야 한다. 만약 자유로운 상상력을 우선한다면 독립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방영 당시 많은 시청자들은 거북선이 실제 진수식 가운데 망실이 된 것으로 인식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텔레비전은 교육과 사회적 가치 계승, 문화계발의 역할을 하는 것이 현실이고 한국은 그 정도가 더 강하다. 때문에 픽션과 상상력을 무제한으로 열어둘 수는 없다.
물론 이는 위대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침몰이 그 입지와 명예를 훼손한다는 점을 넘어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에 얼마나 충실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사례였다. 더 중요한 것은 작품의 내적 구성에 불균형과 모순이 발생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거북선 침몰장면으로 인해 소송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특정 인물을 왜곡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이 장면을 방송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거북선이 만약 특정인물이나 역사적 특정 인물과 연관되어 있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최근의 배설 왜곡 논란은 본인 당사자나 직계가족이 아닌 문중과 후손에서 제기했다는 점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 가문과 문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적 문화 상황은 이런 소송전을 낳게 한 것이고 이는 앞으로 중요하게 영향을 미칠 판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소송에서 원고가 승리를 하려면 영화의 해당 장면이 구체적으로 객관적인 기록과 다른지, 그 장면을 통해 어느 정도의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검증해 보여야 할 것이다.
한편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영화의 표현과 예술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제한할 수 있을 지도 관건이다. 해당 장면이 들어간 영화를 그대로 대중과 미디어 플랫폼에 노출 시킬 경우, 해치게 될 사회적 공동체적 가치는 무엇이고, 그것이 표현과 예술의 자유를 침해했을 때의 감수해야할 그 정도를 비교해야 한다.
배설의 경우, 고향으로 돌아간 후 임란이 끝나고 서울로 압송되어 참형에 처해졌다. 참형의 이유는 전투 중 도피였다. 그런데 정작 그의 귀향을 허락한 이순신은 사망하고 없는 상태였다.
중요한 것은 그의 사망지와 사망 이유가 영화에서는 너무나 다르게 그려졌던 점이다. 영화에서는 거북선을 불태우고 이순신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바다로 도망가다가 안위의 화살에 맞아 사망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 허구이다. 이를 영화가 기재하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단지 창작적 허구를 허용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이 꼭 능사는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를 이순신에게 적용해보자. 이순신은 공식 기록에서는 노량 해전 중 적을 쫓다가 총탄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만약 영화가 이순신이 전투가 끝나고 좌수영에 머물러 있을 때 왜적의 암살범의 손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고 연출하면 어떻게 될까. 이는 분명 역사 왜곡에 해당할 것이다.
최소한 지켜야할 역사적 사실 즉 팩트는 있다. 다만 이런 결말이 이순신은 물론 후손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단순히 역사 왜곡의 문제가 아니라 악인으로 묘사한 정도이다. 특히 특정 인물을 악역으로 그려낼 때 어떤 원칙을 적용해야하는 지 정립해야 한다.
배설이 상대적으로 크게 왜곡된 것은 그가 중요 인물이 아니었고, 악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말 그가 악인일지 의심하지 않았고, 이순신의 위대함을 부각하는 도구적 캐릭터로 활용하는데 제작 초점을 맞추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기존에 악인이라고 알려진 인물은 역사적 기록을 완전히 무시하고 극단적으로 설정하고 그렇게 묘사한다고 해서 관용적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한국사회는 특수한 가문이나 문중 문화가 있음을 무시할 수도 없다. 다만 그것이 사회적 공동체적 가치와 어느정도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지 따져보아야하는 과제가 있다. 오로지 집단적 이익을 위한 차원에서 주장한다면, 더욱 표현의 자유, 예술창작의 자유만 침해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모순적인 것은 자유롭게 창작하는 것 같지만 기존의 인식의 범주 안에서 머무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악인은 더욱 악인으로, 선인은 선인으로 말이다. 이렇게 편견의 확장일때 흔히 창작의 자유나 작품의 다양성은 커녕 획일성으로 치달아 간다. 이는 대중상업영화나 콘텐트에서는 극대화되기 쉽다. 쉽게 영합하려는 행태가 강하기 쉽기 때문이다.
영화 '명량'의 경우도 이에 해당했고, 많은 대중콘텐츠가 이 테두리에서 벗어나니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역사적 사실보다는 상상과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것은 현실적인 어폐와 모순이 있다. 물론 법은 만능이 아니고 그것이 유효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수도 있다. 만약 가능하다면 차기작 '한산'에서는 선한 인물로 등장시키는 것이 창작적 관점의 대안일 수도 있다. 이는 이순신과 사이가 좋았으나 결별하게 되는 곡절을 스토리라인상에 다루는 것을 포함한다.
글 / 김헌식(문화평론가, '위인전이 숨기는 이순신 이야기', '이순신 일상에서 리더십을 읽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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