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 40>살라미스의 승전을 전조해준 엘레우시스 비의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 편집자 주 >
기원전 480년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 대군은 그리스 본토로 물밀듯이 밀려왔다. 페르시아에 항복하지 않고 대항한 아테네는 막강한 페르시아 육군과 맞대결해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아테네 시가지와 아크로폴리스를 적에게 내주고 전 시민을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시킨다. 눈물을 머금고 내준 아티카 전 국토는 페르시아 군에 유린되었다. 아테네가 국가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은 해전이었다. 그런데 운명의 살라미스 해전을 준비하고 있던 아테네 진영에 상서로운 일이 일어났다.
진원지는 아티케의 북서쪽 살라미스 해협에 접한 엘레우시스였다. 페르시아에 망명해서 종군하고 있던 아테네인 디카이오스와 스파르타 왕이었던 데마라토스가 엘레우시스 인근 트리야 평야에 함께 있다가 목격한 일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때 엘레우시스쪽에서 사람 3만 명이 일으킴직한 구름 먼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대체 어떤 사람들이 저런 먼지를 일으키는 것일까 하고 둘이서 놀라고 있는데,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마치 엘레우시스 비의(秘儀) 때의 환호성 ‘이악코스’처럼 들렸다는 것이다.”
아티케 전역의 시민은 이미 살리미스 섬과 펠로폰세소스 반도의 트로이젠으로 소개(疏開)되었으니, 그 많은 주민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디카이오스는 의아해하는 데마라토스에게 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데마라토스여, 페르시아 왕의 군대에 틀림없이 대재앙이 닥칠 것이오. 아티케는 지금 비어있는 만큼, 저것은 아테네인들과 그들의 동맹군들을 돕고자 엘레우시스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가 분명하오. 저 목소리가 펠로폰네소스로 향하면 왕과 그의 육군이 위험해질 것이고, 살라미스에 있는 함선들 쪽으로 향하면, 왕은 아마 함대를 잃게 될 것이오. 엘레우시스 비의는 아테네인들이 어머니와 소녀를 위해 매년 개최하는데, 아테네인이든 다른 헬라스인이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입문(入門)할 수 있소. 그대가 듣고 있는 저 소리는 축제 때 지르는 환호성이오.”
아무튼 엘레우시스 들판에서 일어난 먼지와 소음은 구름으로 변해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살라미스에 있는 헬라스인들의 함대 쪽으로 떠갔다. 이 전조(前兆)대로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끈 그리스 연합함대는 엘레우시스 앞바다인 살라미스 해협의 대 접전에서 페르시아 함대에 대승을 거둔다.
신의 목소리가 보여준 이 전조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일까? 아니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몰린 아테네 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설화였을까? 사실여부를 떠나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 자체가 엘레우시스의 비의(秘儀)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신앙심이 얼마나 특별했는가를 잘 말해준다.
엘레우시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비교(秘敎)의 성지였다. 도대체 엘레우시스의 비의란 어떤 것일까? 비의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이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신비로운 의식의 자세한 사항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내세의 행복은 기원하고 체험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엘레우시스의 비교는 대지의 여신이자 농경과 수확의 여신인 데메테르(Demeter)과 그의 딸 페르세포네의 숭배와 연관된다. 데메테르는 모든 그리스인들이 섬겼던 어머니 신인데 왜 엘레우시스에서 비교로 발전했던 것일까? 이는 저승의 왕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가고 딸을 찾아 사방을 헤매던 데메테르의 신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 페르세포네의 아름다움을 탐하던 하데스는 그녀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묵인 하에 그녀를 납치해 간다. 하지만 페르세포네의 어머니인 데메테르는 이런 음모가 진행되는 줄 몰랐다. 졸지에 딸을 잃고 딸을 찾기 위해 데메테르가 실성한 듯 세상을 헤매는 내용은 오비디우스가 쓴 ‘로마의 축제들’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데메테르는 행방불명된 딸을 찾아 이탈리아 남단의 섬 시칠리아까지 건너간다. 데메테르는 하데스가 납치해 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지만 시칠리아는 하데스가 지상으로 나올 때 이용하는 에트나 화산이 있는 곳이니 어쩌면 딸의 행방을 찾을 가능성도 있었다. 데메테르는 소나무에 불을 붙인 횃불을 들고 시칠리아 곳곳을 미친 듯 찾아다닌 후에 그리스 본토까지 오게 된다.
데메테르는 엘레우시스에 닿아 순박한 농사꾼 노인을 만나 딸을 잃은 슬픔을 위로받는다. 그동안 데메테르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딸을 잃은 슬픔에 단식했던 데메테르가 첫 음식을 맛본 곳이 바로 엘레우시스다. 그녀는 엘레우시스에 와서 비로소 양귀비로 오랜 허기를 달랬다. 데메테르는 그 이후에도 그리스 곳곳, 에게 해의 여러 섬, 멀리 소아시아 지역까지 공중에 뜬 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결국 세상을 비추는 태양에게 물어 딸이 하데스에게 납치되었음을 알게 된다.
다른 설도 있다. 아폴로도로스는 하데스가 납치해 갔다는 사실을 아르골리스 지방의 헤르미온 사람들이 데메테르에게 말해 주었다고 전한다. 이에 분개한 데메테르는 하늘을 떠나 여인을 모습을 한 채 엘레우시스로 갔고 ‘멋진 춤(Kallichoron)'이라는 우물 옆의 바위에 앉아 하염없는 슬픔에 잠겨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기도 한 페르세포네를 하데스가 납치하도록 방조한 제우스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신족들의 오만한 행동에 분노했던 것이다.
데메테르는 엘레우시스의 켈레오스 왕의 궁전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여인들의 환대를 받게 된다. 궁중의 여인들이 우스갯소리를 하며 그녀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던 것이다. 데메테르는 이에 보답하고자 왕비 메타네이라의 아들을 맡아 길러주었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넘치던 모성애는 다른 이의 아들을 키우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해소되었을 것이다.
또 데메테르는 메타네이라의 아들 데모폰을 불사(不死)의 존재로 만들어주기 위해 밤마다 불 위에 얹어 필멸(必滅)의 살을 벗겨냈다. 그러나 데포폰의 유모가 이 비밀스런 작업을 알고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아이는 불에 타죽고 데메테르는 자기가 여신임을 밝히게 된다.
한편 데메테르는 메타네이라의 맏아들인 트립톨레모스에게 날개 달린 용들이 끄는 이륜거를 만들어준 다음 밀을 주어 하늘을 날아다니며 온 대지 위에 뿌리도록 했다. 데메테르는 농경을 돌보는 자신의 임무를 트립톨레모스에게 전수시킨 것이다. 이 또한 자신을 환대해 준 엘레우시스 왕가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데메테르는 이렇게 인간 세상에 내려와 한동안 인간들과 함께 하면서 하늘나라로 올라오지 않았다. 이는 페르세포네의 아버지였던 제우스에 대한 데메테르의 분노의 항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자 제우스가 궁지에 몰렸다. 사실 데메테르가 곡식을 돌보지 않아 들판이 황폐해지고 기근이 들자, 그 피해가 신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봉헌이 크게 줄어 신들의 불만도 고조되었을 것이다.
제우스는 데메테르를 어떻게든 달래야 했다. 제우스는 딸이 지하세계에서 끝까지 단식했다면 이승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전령이 전한 소식에 따르면 페르세포네가 석류 씨 세알을 먹는 바람에 이승세계로 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제우스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하데스와 타협하여 페르세포네가 일 년의 3분의 2는 지상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삼분의 일은 하데스와 지하세계에 머물도록 조치했다.
이로써 봄부터 가을까지 페르세포네와 함께 있게 된 데메테르는 대지의 여신으로서의 본연의 소임을 다할 수 있게 되었고, 들판에는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순조로운 농경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모녀의 상봉과 안정된 생활에 기인했던 것이다. 이런 신화가 얽힌 엘레우시스에서 이들 모녀를 숭배하는 의식이 생겨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엘레우시스는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2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엘레우시스는 아티케 반도에서 코린토스나 스파르타가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건너가거나 본토의 북서쪽으로 나아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있다. 지리적 요충인 곳에 위치한 탓에 오래 전부터 이웃인 아테네와 세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에렉테우스(Erechtheus)와 싸워 그를 죽이는 등 한 때 세력을 떨치기도 했지만, 테세우스가 아테네의 왕이 되면서 엘레우시스는 아테네의 9개의 도시 가운데 하나로 통합된다.
엘레우시스가 아테네에 속하게 되면서 오래 전부터 전래되어 온 비교의 의식은 아테네의 국가적 행사로 확대된다. 기원전 600년 경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은 엘레우시스 비의를 신성한 축제로 만드는 특별법을 만든다. 그 시기에 비의가 행해지던 주 성전인 텔레스테레온(Telesterion)과 부석 건물들이 새롭게 건축된다. 이후 페리클레스 시대 후반에 42개의 내부 기둥으로 갖춘 한 변이 무려 50미터에 이르는 정사각형의 대성전으로 개축되었다.
엘레우시스는 오늘날 엘에프시나로 불리는 작은 도시이다. 성역으로 가는 길 가에 있는 작은 교회가 눈길을 잠시 멈추게 할 뿐 엘레우시스 성역을 주택가가 둘러싸고 있어 한적하다. 하지만 고대기에 이곳은 그리스 세계 뿐 아니라 소아시아와 이탈리아로부터 매년 신비한 의식에 입문하고자 숱한 사람들이 몰려들던 곳이었다.
엘레우시스 성역의 입구에 당도하면 언덕 위의 종탑이 눈에 들어온다. 매 시각 정시와 30분마다 종이 울린다. 필자는 오전 8시 30분에 개관하는 유적지의 첫 번째 방문객이 되었다. 조금 일찍 와서 굳게 닫힌 철문 밖에서 기다리며 신비로운 비밀 의식을 고대하면서 설레던 사람들의 분위기를 상상해봤다.
고대에는 노예나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었지만, 죄를 씻지 않은 범죄자나 그리스어를 정확하게 발음할 수 없는 사람은 입문할 수 없었다. 헬라어 테스트에서 떨어져 발길을 돌렸을 사람도 쾌 있었을 법하다. 지금은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더 이상 비교의 성전은 온전하지 않다. 3천여 년 동안 쌓인 인간들의 내세에 대한 기원만 아련하게 추념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엘레우시스 성역의 입구에는 거대한 기둥들이 쓰러진 채 다시 세워지지 못하고 누어있다. 아마 정문인 프로필라이아(Propylaia)의 기둥들이었을 것이다. 프로필라이아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그것에 못지않게 웅장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기단은 아직도 그래도 남아있다.
엘레우시스 성역은 그리스 시대뿐만 아니라,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도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는 로마인들에게 신성한 곳으로 보호받았다. 로마인들은 이곳 성역의 성벽을 지속적으로 보강했다. 프로필라이아의 중앙 박공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상을 부조해 넣은 것도 이런 작업과 함께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 상을 신성한 성역의 정문에 부조해 넣음으로써 이곳을 방문하는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에게 로마 제국의 위광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로마가 지배하던 지방에 남아있는 이러한 로마황제의 조각이나 시설물들은 황제가 직접 조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해 그 지방의 총독이나 황제 대리인이 조성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프로필라이아 서쪽에는 프로필라이아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2층으로 이루어진 매우 아름다운 서쪽문이 있었다. 그 2층의 상부 지붕의 일부가 남아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또 정문 앞 광장 왼쪽에는 물을 마시거나 손을 씻을 수 있는 급수대도 있었다. 비의에 입문하려던 사람들은 신성한 곳에 들어가기 전에 이곳에서 몸을 정갈하게 했을 것이다.
프로필라이아를 넘어서면 왼쪽에 성전에 봉헌하는 첫 수확한 갖가지 곡식과 봉헌물을 보관하던 창고 터가 남아있다. 프로필라이아에서부터 신성한 길이 이어진다. 대리석 바닥돌이 반들반들하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아름다운 카리아티드(Caryatid) 기둥으로 이루어진 작은 프로필라이아가 있었다.
두 명의 여인으로 이루어진 카리아티드는 화병 케르노스(Kernos)를 머리에 인 형상을 하고 있다. 균형 잡힌 여인의 얼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화병에 부조된 상징적 의미도 눈여겨 볼만하다. 엘레우시스 비교를 상징하는 곡식, 장미꽃 문양, 횃불 등이 새겨져 있다. 가슴 위 부분과 화병의 일부만 남아있는 카리아티드만으로도 높이가 1.96미터, 너비가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다. 전체 카리아티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문 양쪽을 바치던 두 개의 카리아티드 중 하나는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있다고 한다.
엘레우시스 성역의 핵심 건물은 텔레스테리온이다. 이곳에서 비의의 주요 행사가 이루어졌다. 이 성전은 페르시아 전쟁 당시인 기원전 479년에 페르시아의 마르도니우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5세기 중반에 새로 건립되면서 성벽이 보강되었다. 이 성역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 시기에는 아테네의 적들에 의해서도 존중받아 훼손되지 않았다.
엘레우시스 성역은 2700여년 역사의 영광과 굴욕, 성쇠를 함께 하면서 여러 주인들이 거쳐 갔다. 알렉산더를 계승한 마케도니아 군이 이곳에 주둔하기도 했다. 로마 제국 시기에는 하드리안 황제와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대 프로필라이아와 작은 프로필라이아를 증축했고, 엘레우시스 비의에 전 로마 시민을 초청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관심을 갖고 보호하던 것도 잠시였다. 기독교를 로마 국교로 공인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79년에 엘레우시스의 비교의식을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황폐해지기 시작한 성역을 395년 고트족이 침입하여 다시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로써 현세의 고통과 고난을 넘어 내세의 행복을 체험하고 희망을 갖게 하던 엘레우시스의 비의와 신성하던 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텔레스테리온은 사라지게 되었다. (다음 회에는 신비스런 엘레우시스 비의에 얽힌 이야기를 펼쳐집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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