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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재산 나눠준 알렉산더 "난 희망만 있으면 돼"


입력 2015.04.05 09:51 수정 2015.04.05 09:56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48>부강한 나라 마케도니아의 문화유산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마케도니아 왕국의 두 번째 수도 펠라 유적지는 오늘날 작은 촌락을 이루고 있는 펠라 마을의 남서쪽에 있다. 이 시골 마을의 중심지로 들어서면 맨 먼저 알렉산드로스의 동상을 만난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300여 미터 가면 펠라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다. 박물관은 꽤 큰 규모로 부장품도 다양하다.

펠라(Pella) 왕성은 평지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세워졌다. 왕성 주변은 넓은 들판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대개 높은 산을 의지해 주변을 둘러싼 도성을 세웠다. 또 중심부의 높은 산이나 언덕에는 으레 요새화된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 그러나 펠라에는 아크로폴리스가 따로 없다. 도성이 왕궁을 포함하여 도시화된 시가지로 이루어졌다. 물론 평지의 시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도시 전체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쌓았다. 그렇다고 해도 평지의 도성은 군사적 차원에서 보면 좋은 입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첫 번째 수도인 아이가이처럼 산을 등지고 도성을 건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마케도니아는 이미 기원전 4세기 전반부터 그리스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런 자신감이 마케도니아 도성의 도시계획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국가 및 도시 방호에 대한 자신감이 투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펠라 마을 광장에 있는 알렉산드로스 동상 ⓒ박경귀

펠라 마을의 한 가정집이다. 현관 입구에 알렉산드로스 두상 조각을 건 모습이 이채롭다. 알렉산드로스의 고향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박경귀

펠라 왕성 유적지 남쪽 입구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모습, 북쪽으로 낮은 구릉에 펠라 촌락이 보인다. 마을의 서쪽에 펠라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박경귀

펠라 왕성 터의 중앙 부근에서 남서쪽으로 바라본 모습. 너른 들이 멀리 펼쳐져 있다. ⓒ박경귀

왕성의 도시 구역은 매우 큰 면적으로 조성되었다. 왕궁과 도시 주거지역을 포함하여 남북으로 2.5km, 동서로 1.5km에 이를 정도였다. 도시 내는 6~9m 폭의 도로가 격자형으로 시설되었다. 마케도니아의 국력을 과시하기에 충분한 규모다. 이 정도의 도시 규모는 기원전 4세기 무렵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큰 규모로 볼 수 있다.

펠라 왕성 시가지에 조성되었던 넓은 도로이다. 아고라와 인접한 가도이다. ⓒ박경귀

주목할 것은 도시 시설에 매우 세련된 기술이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구은 점토 또는 돌로 된 관을 통해 상수 및 하수처리를 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었으니 놀랍다. 또 공중목욕장과 공동우물까지 갖춰 쾌적하고 편리한 도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민간 고급 주택들은 대개 도리아식 및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둘러싸인 중정(中庭)을 갖추었고, 중정이나 연회장의 바닥은 모자이크로 치장되었다. 모자이크 작품들의 내용은 그리스인들이 공유하던 신화와 전설의 재미있는 소재나 영웅들의 활약상을 묘사한 내용들이었을 것이다. 그리스인에게 신화와 전설은 삶의 근원적 힘을 충전시켜주는 원동력이었다.

펠라 왕성의 한 고급 주택의 중정(中庭) 바닥에 수놓아졌던 모자이크이다. 디오뉘소스가 낙소스 섬에 도착하는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낙소스 섬에서 테세우스가 배신하여 버린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를 만난다. 이 주제는 그리스인들이 즐겨 이야기하는 설화인데 이 대목이 예술작품으로 묘사된 희귀한 작품이다. 왼쪽의 지팡이를 든 청년이 디오뉘소스이고, 오른쪽의 소년은 그의 추종자로 보인다. 테살로니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펠라 왕성의 한 고급 주택의 중정(中庭) 바닥에 수놓아졌던 모자이크이다. 아폴론이 구애하기 위해 다프네를 좇고 그녀가 달아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200~250년 작품, 테살로니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왕궁은 60,000㎡의 면적을 차지하며 열주랑과 중정을 갖춘 다섯 개의 대형 건물로 이루어졌다. 건물은 회의장, 접견실, 작업장, 목욕실을 갖춘 구획된 공간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도시의 중심은 아고라였다. 70,000㎡ 넓이의 공간에는 거대한 상업시설 및 행정시설이 들어섰다. 광장 옆으로 동서로 뻗은 큰 도로가 있었다. 아고라에는 도기와 테라코라 제품, 금속 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섰고, 음식점과 여러 지방에서 나는 와인을 파는 상점과 향수 가게도 있었다. 펠라 고고학 박물관에는 아고라에서 발굴된 다양한 예술작품과 도기 등 당시의 생활용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펠라 왕성의 아고라에서 발굴된 술잔으로 쓰인 도기이다. 펠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고라에서 발굴된 테라코타 작품이다. 점토 작품으로 드물게 섬세함을 자랑한다. 펠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고라에서 발굴된 작품이다. 투박하지만 여인의 역동적인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펠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고라 옆의 각종 시설 및 상점이 있던 자리이다. ⓒ박경귀

아고라의 북쪽 측면에는 지방의 통치자들을 위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고라의 남서쪽에는 열주와 중정을 갖춘 2층으로 된 복합건물이 있었다. 또 도시의 아고라 밖 다른 구역에는 다양한 작업장이 있었다. 이곳은 로마에 의해 마케도니아 왕국이 멸망하게 되는 기원전 168년 이후에도 존속했고, 기원전 1세기 초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다.

펠라는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헬레니즘 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도시에는 다양한 신전도 위치했다. 헬레니즘 시기에는 토착신인 대론(Darron) 신전, 키벨레와 아프로디테의 신전도 있었다. 또 도시 교외에는 호족과 시민들을 위한 묘지가 있었다. 마케도니아 무덤은 호족들은 봉분을 덮고 내부에 신전 형태의 석실에 석관을 안치했다.

무덤 내부에는 전면에 도리아식 기둥을 세운 신전 형식의 석실을 만들었다. 석실의 내부 벽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외부의 동양적 봉분과 내부의 그리스 양식의 건물식 석실은 동서양의 문명의 접점에 있었던 마케도니아가 만들어낸 독특한 양식이다. 마케도니아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낸 헬레니즘 문화의 한 양태라고 볼 수 있다.

펠라 왕성 유적지에서 발굴된 신전의 기둥 일부, 정확히 어떤 신전 건물의 일부인지 확인되지 않은 유물이다. 테살로니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무덤 내부의 석실 모습이다. 이오니아식 기둥을 한 신전 형식의 석실이다. 아이가이 박물관 브로셔의 사진이다. ⓒ박경귀

마케도니아 왕실의 왕릉 석실 내부에 그려졌던 프레스코화이다. 말의 역동적인 묘사가 탁월하다. 기원전 4~3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아이가이 박물관 브로셔 ⓒ박경귀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문명의 핵심 진원지인 아테네와 아티케 반도로부터 다양한 문화예술 역량을 전수받는데 노력한 것 같다. 특히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 때 마케도니아 여러 지역에서 도자기, 테라코타, 조각, 금속 공예와 모자이크 작품들이 양산되었다. 아테네의 예술 작품들을 수입하면서 자체 제작 역량도 향상시켜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아테네 동쪽에 있는 아기아 파라스케비(Aghia Paraskevi) 구역에서 생산된 도기의 수입품이다. 펠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누가 아테네의 주신(主神)이 될 것인가를 놓고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시합을 한 신화를 묘사한 도기화이다. 아테나는 아크로폴리스에 올리브 나무가 돋아나게 했고, 포세이돈은 샘물이 솟게 했다. 아테네인들은 아테나를 주신으로 선택한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아테네의 생존과 번영에 필요한 귀중한 선물을 준 두 신을 함께 경배하기 위해 에렉테이온 신전에 두 신의 성소를 함께 마련했다. 지혜로운 판단이었다. 펠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암포라를 어깨에 메고 있는 청년, 테살로니키 지방에서 150년경 제작한 것으로 추정, 테살로니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알렉산더 친척으로 추정되는 두상이다. 머리카락 및 수염의 묘사가 매우 섬세한 역작이다. 175~200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테살로니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마차에 부착했던 청동장식물이다. 아테나 여신이 메두사의 머리를 투구처럼 쓰고 아이기스 갑옷을 입은 모습이다. 기원전 315년에 제작, 테살로니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펠라 왕궁 터에서 발굴된 핵심적인 유적은 다양한 모자이크 작품이다. 펠라에 있던 왕궁을 장식했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사자 사냥 모자이크’이다. 이 모자이크의 정경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다.

가장 유력한 해석은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정벌을 하는 과정에서 소아시아의 그랜니쿠스(Granicus) 강가에서 벌인 사냥을 묘사한 것이란 설이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친구 장군들과 사자사냥을 했는데 사자 공격을 받던 알렉산드로스를 장군 크라테루스(Craterus)가 구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명예욕이 대단했다. 그는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우스 등 그리스 영웅들을 늘 동경했다. 그가 사자 사냥과 같은 위험한 모험을 마다하지 않을 것도 네메아에서 사자를 처치했던 헤라클레스의 영광을 재현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리스 시대에 사냥은 영웅들에게 최고의 전투 훈련이자 체력단련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들이 평시에 자주 사냥대회를 열어 용맹과 민첩함을 조련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창으로 사자를 공격하려는 알렉산드로스, 펠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칼로 사자를 공격하는 크라테루스, 펠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사자 사냥 모자이크 있던 자리 ⓒ박경귀

사슴 사냥의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 펠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펠라 왕성에서 ‘디오니소스의 집’이라 불린 건물이다. 이 건물은 2,160㎡에 달했고 도리아식 기둥으로 이루어진 남쪽 중정과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이루어진 북쪽 중정을 갖고 있었다. 이 건물은 기원전 325~300년 사이에 건립되었다. 입구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건물의 동쪽에 있었고, 북쪽 전각은 2층으로 이루어졌다.

디오니소스 전각의 복원 모형도, 펠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표범의 등에 올라탄 디오니소스의 모습이다. ‘디오니소스의 집’ 중정을 장식했던 작품이다. 펠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디오니소스 모자이크가 있던 자리 ⓒ박경귀

‘헬렌의 집‘으로 불린 전각의 모자이크도 볼만하다. 남쪽 구역에 있는 이 전각은 펠라 왕성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이다. 넓이가 2,350㎡에 달했다. 여러 개의 방들로 구성되었고, 중정에는 유명한 헬레네의 납치 사건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있었다. 테세우스가 친구 페이리투스(Peirithoos)와 작당하여 스파르타에서 최고의 미인으로 이름났던 어린 헬레네를 납치했었다.

물론 이때의 납치 사건은 오래지 않아 헬레네의 쌍둥이 동생인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에 의해 구출되는 바람에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전쟁까지 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에게 헬레네가 끌려가면서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절세미인이 겪는 인생 수난사가 세계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헬렌의 집, 테세우스에 의한 헬레네 납치 사건이 묘사된 모자이크가 바닥에 치장되었다. ⓒ박경귀

테세우스에 의한 헬렌의 납치 모자이크이다. 테세우스가 헬레네를 마차에 태우려 하고 있고, 뒤에서 헬레네의 언니가 이들을 좇고 있다. 말을 몰고 있는 이는 테세우스의 친구 페이리투스이다. 기원전 325~300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펠라는 수많은 화려한 전각과 편리한 시설을 갖춘 번영한 도시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 왕성에 축적된 수많은 재산과 안온한 생활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에겐 나아가야 할 거친 길이 따로 있었다. 3차례나 그리스를 침략했던 페르시아를 응징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리스 세계를 통일한 부왕 필리포스 2세의 업적을 뛰어넘을 위업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원정을 떠나기 전에 펠라 왕성과 마케도니아에 전역에 산재한 자신의 재산과 보물을 모두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출정을 떠나기 전에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누고 싶다.
땅과 집과 옷과 보석들은 이곳에 남아있는 모든 친구들에게 줄 것이다.
나에게 그런 것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왕이시여, 그렇다면 본인을 위해 무엇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페르디카스가 대담하게 물어보았다.
"희망이다." 알렉산더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희들도 왕과 같은 것을 가지겠습니다. 당신의 희망을 나누겠습니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펠라 왕성의 화려한 궁전도 숱한 보물도 그의 탐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더 큰 꿈을 향해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렸다. 알렉산드로스에게 가장 큰 소중한 보물은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담대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다.

펠라 왕궁 터에 남아있는 전각의 기둥들, 2300여 년 전 화려했던 제국의 정경을 떠올리기 어렵다.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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