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 48>부강한 나라 마케도니아의 문화유산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마케도니아 왕국의 두 번째 수도 펠라 유적지는 오늘날 작은 촌락을 이루고 있는 펠라 마을의 남서쪽에 있다. 이 시골 마을의 중심지로 들어서면 맨 먼저 알렉산드로스의 동상을 만난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300여 미터 가면 펠라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다. 박물관은 꽤 큰 규모로 부장품도 다양하다.
펠라(Pella) 왕성은 평지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세워졌다. 왕성 주변은 넓은 들판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대개 높은 산을 의지해 주변을 둘러싼 도성을 세웠다. 또 중심부의 높은 산이나 언덕에는 으레 요새화된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 그러나 펠라에는 아크로폴리스가 따로 없다. 도성이 왕궁을 포함하여 도시화된 시가지로 이루어졌다. 물론 평지의 시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도시 전체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쌓았다. 그렇다고 해도 평지의 도성은 군사적 차원에서 보면 좋은 입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첫 번째 수도인 아이가이처럼 산을 등지고 도성을 건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마케도니아는 이미 기원전 4세기 전반부터 그리스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런 자신감이 마케도니아 도성의 도시계획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국가 및 도시 방호에 대한 자신감이 투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왕성의 도시 구역은 매우 큰 면적으로 조성되었다. 왕궁과 도시 주거지역을 포함하여 남북으로 2.5km, 동서로 1.5km에 이를 정도였다. 도시 내는 6~9m 폭의 도로가 격자형으로 시설되었다. 마케도니아의 국력을 과시하기에 충분한 규모다. 이 정도의 도시 규모는 기원전 4세기 무렵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큰 규모로 볼 수 있다.
주목할 것은 도시 시설에 매우 세련된 기술이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구은 점토 또는 돌로 된 관을 통해 상수 및 하수처리를 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었으니 놀랍다. 또 공중목욕장과 공동우물까지 갖춰 쾌적하고 편리한 도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민간 고급 주택들은 대개 도리아식 및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둘러싸인 중정(中庭)을 갖추었고, 중정이나 연회장의 바닥은 모자이크로 치장되었다. 모자이크 작품들의 내용은 그리스인들이 공유하던 신화와 전설의 재미있는 소재나 영웅들의 활약상을 묘사한 내용들이었을 것이다. 그리스인에게 신화와 전설은 삶의 근원적 힘을 충전시켜주는 원동력이었다.
왕궁은 60,000㎡의 면적을 차지하며 열주랑과 중정을 갖춘 다섯 개의 대형 건물로 이루어졌다. 건물은 회의장, 접견실, 작업장, 목욕실을 갖춘 구획된 공간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도시의 중심은 아고라였다. 70,000㎡ 넓이의 공간에는 거대한 상업시설 및 행정시설이 들어섰다. 광장 옆으로 동서로 뻗은 큰 도로가 있었다. 아고라에는 도기와 테라코라 제품, 금속 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섰고, 음식점과 여러 지방에서 나는 와인을 파는 상점과 향수 가게도 있었다. 펠라 고고학 박물관에는 아고라에서 발굴된 다양한 예술작품과 도기 등 당시의 생활용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아고라의 북쪽 측면에는 지방의 통치자들을 위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고라의 남서쪽에는 열주와 중정을 갖춘 2층으로 된 복합건물이 있었다. 또 도시의 아고라 밖 다른 구역에는 다양한 작업장이 있었다. 이곳은 로마에 의해 마케도니아 왕국이 멸망하게 되는 기원전 168년 이후에도 존속했고, 기원전 1세기 초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다.
펠라는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헬레니즘 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도시에는 다양한 신전도 위치했다. 헬레니즘 시기에는 토착신인 대론(Darron) 신전, 키벨레와 아프로디테의 신전도 있었다. 또 도시 교외에는 호족과 시민들을 위한 묘지가 있었다. 마케도니아 무덤은 호족들은 봉분을 덮고 내부에 신전 형태의 석실에 석관을 안치했다.
무덤 내부에는 전면에 도리아식 기둥을 세운 신전 형식의 석실을 만들었다. 석실의 내부 벽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외부의 동양적 봉분과 내부의 그리스 양식의 건물식 석실은 동서양의 문명의 접점에 있었던 마케도니아가 만들어낸 독특한 양식이다. 마케도니아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낸 헬레니즘 문화의 한 양태라고 볼 수 있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문명의 핵심 진원지인 아테네와 아티케 반도로부터 다양한 문화예술 역량을 전수받는데 노력한 것 같다. 특히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 때 마케도니아 여러 지역에서 도자기, 테라코타, 조각, 금속 공예와 모자이크 작품들이 양산되었다. 아테네의 예술 작품들을 수입하면서 자체 제작 역량도 향상시켜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펠라 왕궁 터에서 발굴된 핵심적인 유적은 다양한 모자이크 작품이다. 펠라에 있던 왕궁을 장식했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사자 사냥 모자이크’이다. 이 모자이크의 정경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다.
가장 유력한 해석은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 정벌을 하는 과정에서 소아시아의 그랜니쿠스(Granicus) 강가에서 벌인 사냥을 묘사한 것이란 설이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친구 장군들과 사자사냥을 했는데 사자 공격을 받던 알렉산드로스를 장군 크라테루스(Craterus)가 구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명예욕이 대단했다. 그는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우스 등 그리스 영웅들을 늘 동경했다. 그가 사자 사냥과 같은 위험한 모험을 마다하지 않을 것도 네메아에서 사자를 처치했던 헤라클레스의 영광을 재현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리스 시대에 사냥은 영웅들에게 최고의 전투 훈련이자 체력단련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들이 평시에 자주 사냥대회를 열어 용맹과 민첩함을 조련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펠라 왕성에서 ‘디오니소스의 집’이라 불린 건물이다. 이 건물은 2,160㎡에 달했고 도리아식 기둥으로 이루어진 남쪽 중정과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이루어진 북쪽 중정을 갖고 있었다. 이 건물은 기원전 325~300년 사이에 건립되었다. 입구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건물의 동쪽에 있었고, 북쪽 전각은 2층으로 이루어졌다.
‘헬렌의 집‘으로 불린 전각의 모자이크도 볼만하다. 남쪽 구역에 있는 이 전각은 펠라 왕성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이다. 넓이가 2,350㎡에 달했다. 여러 개의 방들로 구성되었고, 중정에는 유명한 헬레네의 납치 사건을 묘사한 모자이크가 있었다. 테세우스가 친구 페이리투스(Peirithoos)와 작당하여 스파르타에서 최고의 미인으로 이름났던 어린 헬레네를 납치했었다.
물론 이때의 납치 사건은 오래지 않아 헬레네의 쌍둥이 동생인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에 의해 구출되는 바람에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전쟁까지 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에게 헬레네가 끌려가면서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절세미인이 겪는 인생 수난사가 세계의 역사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펠라는 수많은 화려한 전각과 편리한 시설을 갖춘 번영한 도시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 왕성에 축적된 수많은 재산과 안온한 생활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에겐 나아가야 할 거친 길이 따로 있었다. 3차례나 그리스를 침략했던 페르시아를 응징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리스 세계를 통일한 부왕 필리포스 2세의 업적을 뛰어넘을 위업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원정을 떠나기 전에 펠라 왕성과 마케도니아에 전역에 산재한 자신의 재산과 보물을 모두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출정을 떠나기 전에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누고 싶다.
땅과 집과 옷과 보석들은 이곳에 남아있는 모든 친구들에게 줄 것이다.
나에게 그런 것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왕이시여, 그렇다면 본인을 위해 무엇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페르디카스가 대담하게 물어보았다.
"희망이다." 알렉산더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희들도 왕과 같은 것을 가지겠습니다. 당신의 희망을 나누겠습니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펠라 왕성의 화려한 궁전도 숱한 보물도 그의 탐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더 큰 꿈을 향해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렸다. 알렉산드로스에게 가장 큰 소중한 보물은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담대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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