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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㉞] 시대착오적 조선 군대


입력 2021.06.22 14:01 수정 2021.06.22 14:21        데스크 null (desk@dailian.co.kr)

한말 대한제국 군인ⓒIsabella Bird Bishop, Korea and her Neighbours (1897)

조선은 군제 개편을 하면서 서울에 시위대를 편성하고, 주요 지역에는 이른바 근대식 군대라고 할 수 있는 진위대를 주둔시켰다. 조선의 군대 개편은 아주 단기간에 이뤄졌다. 금세 대규모 병사를 모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했다. 여기에 더불어 외국 교관의 초빙하여 이들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훈련도 하고 군복도 갖춰 입는 등 외형상 빠르게 변화했다. 많은 외국인들도 이러한 변화를 보며, 특히 조선의 군역 체계가 작동하는 상황에 매우 놀란다.


문제는 이들의 훈련과 그들이 들고 있던 무기는 사실 장식용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처음 조선군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본 교관을 비롯하여 이후에 조선군을 가르친 중국, 미국, 러시아 교관 역시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군을 교련하면서 이런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본국에 보고했다. 전 세계가 조선군을 우습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이 강조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복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식 규정 역시 끊임없이 바뀐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점차 복식이 간소해지고, 실용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고종이 도입한 복식은 시대를 역행하여 점차 화려해졌다. 문제는 의례복뿐만 아니라 전투복조차 여기에 맞춰 끊임없이 화려해졌다. 심지어 실제 입고 있는 옷이 규정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테면 초기에는 프랑스식을 따랐지만, 보불전쟁 이후 독일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청일전쟁 이후에는 다시 일본군 병사의 복식을 따르는 형태로 변하였다.


더 큰 문제는 조선의 복식 자체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다. 군복에서 예식 때 입는 정복과 전투복의 차이는 분명하다. 예복을 입고 전투를 수행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조선군은 그 차이가 흐릿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 군복을 제대로 교체해 주지도 못했다. 규정을 바꾸면 군복을 비롯해 관련된 사항을 다 바꿔야 하는데, 예산 등 여러 가지 문제로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에 훈련하는 사진을 보면 시기에 맞지 않는 군복이 서로 섞여 있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부대에서도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식과 독일식, 러시아식, 일본식 군복이 마구 뒤섞여 있기도 했다.


훈련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선군의 핵심은 서울에 주둔한 시위대였는데, 이들의 훈련은 주로 분열이나 열병, 혹은 줄지어 서있는 사선대형을 이루는 데 집중되었다. 당시 전쟁 양상을 고려하면 사실상 전투 훈련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어쩌면 이런 훈련은 당시 고종의 요구를 그대로 재현한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당시의 대대 전술교범이다.


당시 조선의 군사 교범에는 변화한 전쟁 양상을 참고하여 근대적 전술이 일부 반영되었지만, 그런 내용은 극히 일부를 차지할 뿐이었다. 상당 부분은 근대적 전투 양상으로 바뀌기 전, 혹은 그 과도기 때 만들어진 서양 교범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사선대형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대열을 편성하는 것이 중요하게 다뤄졌다. 이러한 구식 전술은 대량살상무기와 만나면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군인들은 열심히 대형을 구성하고, 사선대형으로 진형을 구축했다. 이미 기관총이 실용화된 상황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이런 모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용한 교범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후 독립군 교관 사이에 벌어진 주요 논쟁 중 하나는 장차 벌어질 전쟁 양상에 대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사관학교를 나온 독립군은 러일전쟁 때 일본이 경험한 전쟁 양상, 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참전하면서 분석한 내용을 반영하여 변화된 전쟁 양상에 초점을 맞췄고, 이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진 일본 교범으로 군사훈련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대한제국군에서 독립군에 가담한 교관들이 생각하는 전쟁 양상은 달랐다. 이들은 여전히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전쟁 양상을 답습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런 논쟁 때문에 많은 갈등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독립군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 보여주는 것처럼, 안타깝게도 조선이 지향한 군사 개혁의 모습은 보불전쟁과 청일전쟁, 그리고 러일전쟁을 거치며 분명해진 전쟁 양상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사선대형 같은 전근대적 모습은 이후 대한제국에서 사용한 교범에도, 당시 훈련 모습과 군복의 장식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군사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이어졌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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