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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배우발견⑯] 설경구, 사실주의 연기 끝에서 돋은 섹시


입력 2022.01.23 14:46 수정 2022.01.24 08:44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배우 설경구. 영화 '킹메이커'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배우 설경구는 언제부터 ‘섹시’했을까.


최근 출연하는 영화마다 어떤 배역을 맡든 섹시하다. 여기서 섹시라 함은, 단지 육체미라든가 성적 매력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돋보인다, 관객의 마음을 끌어 유심히 보게 하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설경구는 분명 장년일 때보다 잘 생겨 보이고, 과거에는 성별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되레 요즘 들어 남자라는 특성이 눈에 들어온다.


일테면 오는 26일 개봉하는 영화 ‘킹메이커’(감독 변성현, 제작 씨앗필름, 배급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에서 생전의 김대중이라는 한국 현대정치사의 거목을 연기했는데, 매력적이다.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모사하지도 않았지만, 누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인지 모르고 봐도 김대중이 연상되는 ‘그 오묘한 경계선’에서 표현했다. 연기가 기막혀서만이 아니다. 관객의 눈을 붙들어 세우는 힘이 온몸에서 발산한다. 젊은 시절의 정치인 김대중이 저랬을까 싶게 인간으로서뿐 아니라 남성으로서의 매력이 느껴진다.


영화 '자산어보'의 창대(변요한 분)와 함께한 촬영현장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최근작 ‘자산어보’(감독 이준익, 제작 ㈜씨네월드, 배급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2019)에서 정약전을 연기했을 때도 남자의 향취가 느껴졌다. 캐릭터 표현의 기본은 보통 사람보다 너무 일찍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꿈꾼 개혁적 철학자이자 사람의 생활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자의 모습이었고, 그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깊이 있게 표현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정약전의 유머와 허물없음은 창대(변요한 분)의 마음을 여는 인간미를 넘어 가거댁(이정은 분)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남성미로 힘을 발휘한다.


그저 귀양 온 중늙은이 같지 않은, 누군가에게 곁을 내주고 정인을 지켜줄 수 있는 남자로 보였고 그렇게 했다. 배우 설경구의 섹시미가 없었다면, 정약전의 가거댁과의 중혼은 자연스러워 보이기 어려웠다. 정약전의 남성미는 자연스러움을 넘어 가거댁과의 황혼이 아름다워 보이도록,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떠나지 않는 가거댁의 선택이 이유 있어 보이도록 하는 근간이 됐다.


조현수(임시완 분)와 한재호(설경구 분)의 브로맨스. 영화 '불한당' 스틸컷 ⓒCJ ENM 제공

설경구가 눈에 띄게 섹시해 보인 건 ‘킹메이커’의 변성현 감독과 처음 합을 맞춘 영화 ‘불한당’(제작 CJ ENM·폴룩스㈜바른손, 배급 CJ ENM, 2016) 때였다. 이 배우가 이토록 슬림핏 수트가 잘 어울리는 사내였나, 눈을 비빌 정도로 섹시했다. 외양의 문제만이 아니라 배우 임시완과 펼치는 브로맨스, 극중 현수(임시완 분)를 향한 아낌 없는 의리가 재호(설경구 분)를 더욱 멋진 남자로 만들었다. 영화 첫 등장을 장식한 스포츠카 장면은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불한당’으로 프랑스 칸에서 만난 설경구는 세계 각지에서 온 배우들 못잖은 마력을 발산했다.


개인적으로는 배우 설경구 섹시의 시작을 ‘불한당’으로 여기지 않는다. 영화 ‘소원’(감독 이준익, 제작 ㈜필름모멘텀,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2013)으로 생각한다. 딸 아이가 말할 수 없는 참상을 당했는데, 아빠가 섹시해서 어쩌느냐고? 연기 잘못한 거 아니냐고? 잘못이 있다면 설명이 부족한 기자에게 있다.


영화 '소원'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소원’을 통해 기자가 얘기하고자 하는 ‘배우의 섹시함’에 담긴 뜻을 하나 더 보태고 싶다. 전형적이지 않다, 진짜인 것처럼 날 것처럼 연기가 입체적이라는 뜻이다. 딸 아이가 입에 담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고 했을 때 쉽게 연상되는 눈물범벅 혹은 감정 과다의 아버지 연기는 그저 ‘연기’로, 슬픔의 흉내로 보인다. 하지만 설경구는 그렇게 연기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을 부대 캐릭터를 구축하고 마음을 다해 표현했다.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는 연기다.


영화 ‘소원’ 이후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가 더 있다. 그 이후로는 독재자가 되건. 살인자가 되건. 노랑머리를 하든. 바다에서 자식을 잃고 마음으로 도망쳤다 뒤늦게 수습하든, 전신마비로 거동을 못 하든 자꾸 눈길을 붙들었다. 연기가 아니라 캐릭터와 그 내면에 주목하게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은근히 이 인물이 남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인물을 풍성하게 했다.


배우 설경구. 영화 '킹메이커' 인터뷰 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지난 18일 화상으로 진행된 ‘킹메이커’ 관련 인터뷰에서 설경구는 ‘섹시’라는 표현에 당황과 민망을 표했다. 더구나 ‘소원’이라는 대목에서는 놀라움을 드러냈다.


“‘소원’ 때도 그랬어요? 분도 칠하지 말고 맨 얼굴로 들이밀고 하자, 이준익 감독의 디렉팅을 따랐던 연기였어요. 분장 시간 없이 그냥 바로 연기했습니다. (섹시를) ‘관객의 마음을 끄는 힘’이라고 하신다면, 그저 저의 마음가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솔직하게 이 이야기와 맞닥뜨려 보자 하는 게 진솔하게 가닿았나, 매력으로 다가갔나 (싶습니다).”


“매력적으로 보일 거야! 계산이 서는 사람도 아니고. 솔직하게 다가가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며, 연기하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해 온 것뿐입니다. 저의 숙제는 ‘연기하지 말자’, 그런 저의 마음을 관객분들께서 읽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영화 '박하사탕'(1999) 스틸컷 ⓒCGV 아트하우스

연기하지 말자, 라는 배우 설경구의 대전제는 대학교 시절부터 잉태된 모양이다. 은사 최형인 교수의 이름을 얘기했다. 연극 ‘지하철 1호선’의 연출자 김민기 감독, 영화 ‘박하사탕’(제작 이스트필름, 배급 CGV 아트하우스, 1999)과 ‘오아시스’(제작·배급 CJ엔터테인먼트, 2002)로 깜짝 놀랄 연기파 배우를 우리에게 데려와 준 이창동 감독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영화 ‘박하사탕’ ‘오아시스’ 때 이창동 감독님이 영향을 많이 줬어요. 연기는 사실적이어야 한다. 스스로도 모든 연기를 사실적으로 풀려고 하고요. ‘연기의 기본은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은 이창동 감독에게 배운 겁니다, 한양대 최형인 교수에게 배운 것이고, 극단 학전의 김민기 님에게 배운 겁니다. 기본은 놓치면 안 된다, 그 기본은 바로 ‘연기하지 말아라’. 잘 안 되면서도 저 또한 놓치지 않고 싶은 게 아무것도 하지 마라, 연기하지 마라(입니다).”



영화 '킹메이커' 촬영현장에 선 배우 설경구와 감독 변성현(왼쪽부터) ⓒ이하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연기하지 말라는 가르침, 영화 ‘소원’과 ‘자산어보’의 이준익 감독의 디렉팅과 같다. 마스터들은 통하는 것일까. 배우 설경구는 ‘연기하지 않는’ 연기의 기본은 지키되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불한당’에 이어 ‘킹메이커’, 그리고 향후 ‘길복순’까지 세 영화를 함께하는 변성현 감독과의 작업이다. 개성 넘치는 스타일이 확고한 변성현 감독과의 조우 속에서 배우 설경구의 감각은 젊어지고 있다. ‘사실적’의 정반대라 할 수 있는 ‘영화적’ 세계로의 진입이다.


“변성현 감독을 만나면서 ‘아, 이걸 영화적으로 푸는 재미도 있구나’ 느끼며 많이 바뀌었어요. 처음(‘불한당’)에는 이런 교도소가 어디 있어, 교도소 방문 다 열려 있고 담배를 팔아? 일반 사람들 사는 데야. 마실 가듯 옆방 왔다 갔다 하고(라고 생각했어요). 만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오래 걸렸죠. 처음엔 어려워서 오래 걸렸어요. 이제는 다 이해하게 돼 버린 것 같아요(웃음). 그게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세 작품째 하고 있는데, 제가 변 감독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불한당’ 다르고, ‘킹메이커’ 다르고. 지금 찍는 것(‘길복순’) 또 달라요. 감독의 의도도 다 달라요. 그런 면들이 궁금한 것 같습니다. 그 궁금함 때문에 계속하는 것 같고요. 고맙게도 제게 또 하자고 해서 하게 됐어요. 역할 크지 않지만, 저의 또다른 면을 보게 된 것 같아 좋습니다. 분명히 이 나이에도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체가 변 감독도 성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설경구의 초심, 영화 '킹메이커' 대본 리딩 현장 ⓒ

인터뷰 동안 새로이 발견한, 배우 설경구의 섹시 비결이 있다. “이 나이에도 성장하는” 배경에는 ‘궁금함’이 있고, 또 하나 그 나이에도 유지하고 있는 ‘겁’이 있었다. 겁은 초심을 잊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저한테 주어진 역을 다 겁내며 하고 있어요. 후배가 ‘아직도 슛 들어가기 전에 떨리세요?’, 제가 ‘당연히 떨리지’. ‘아니, 경력이 이렇게 되셨는데도 그러세요?’, ‘난 그래,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난 그래’. 특히 촬영 첫날, 초반에 톤을 어떻게 잡을지 긴장되고 떨려요.”


“김운범만 해도 너무나 존경받는 인물이에요. 실존 인물 바탕이다 보니 역사적 배경을 따라가요, 안 따라가면 안 되는 부담이 있어요. 킹메이커인 선거전략가 엄창록(배우 이선균이 연기한 서창대의 실존인물)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운신의 폭이 있어요. 김운범은 외로워요. 주도적으로 팀을 끌고 나가지만 영화에서는 리액션을 해요, 연설 빼고는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아요. 운신의 폭이 좁고, 입체적으로 보이지 않아요. 큰 판을 깔아주는 캐릭터지 감정의 기복이 없는 인물이라 복합적으로 피하고 싶은 인물이었어요. (변성현 감독에게) 서창대 하겠다고 해도 변 감독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더라고요.”


배우 설경구와 역사적 인물 김대중 사이의 충돌, 그 경계에서 탄생한 캐릭터 김운범 ⓒ

변성현 감독이 김운범 역에는 배우 설경구 외에는 없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인 이유, 그 결과물은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좋은 배우들은 이미 연기된 바 있는 동일 인물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 준다. 역시 설경구구나 싶은, 놓치면 아까운 명연기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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