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들 대부분 '연예인 갑질' 경험
매니저 직업 만족도 지난해 30.8%...전년 대비 상승
“아무개 가수의 매니저가 새로 음반을 냈다고 틀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노래를 듣고 거절했다. 내 나름대로 내 프로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약 한 달간 쫓아다니더니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채 칼을 들고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자신의 가수 노래를 안 틀어주면 배를 갈라 죽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1994년 한겨레21 기사 中 한 현직 방송PD 회고담)
지금은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든 이 극단적인 이야기는 90년대까지만 해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기사를 내리지 않으면 한 판 붙겠다’는 매니저의 협박도 있었다. ‘연예인 매니저’라고 하면 보통 주먹 꽤나 쓰는 사람들로 통하는 시대라 가능했던 일이다.
현재는 연예인 매니저라는 직업이 하나의 비즈니스 사업으로 부각되면서 소위 ‘주먹 쓰는 형님’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업계의 처우도 개선됐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매니저들을 ‘심부름꾼’으로 인식하는 낡은 생각도 남아있는 듯 보인다. 얼마 전까지도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예인과 매니저 사이에 불거진 ‘갑질 논란’도 이런 낡은 인식의 잔재로 볼 수 있다.
10년차 배우 매니저 A씨는 “배우와 매니저 간 갑질 논란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하면서 본인은 물론 주변 매니저들도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자녀가 있는 배우를 담당했던 적이 있는데 당시 아이들을 직접 학원에 데려다 주고, 일정이 없는 날에도 배우의 가족들을 챙기는 일에 늘 소환됐다”면서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됐고, 지금은 그 때보단 나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특히 연예인의 갑질 논란이 공론화된 이후에는 연예인들도 조심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했다.
아이돌 그룹의 매니저로 11년째 일하고 있는 B씨는 “매니저들도 직급과 파트 분담에 따라 각자의 역할이 나눠져 있다. 신입 때는 로드매니저로서 운전하고 심부름 하는 게 내 일의 전부였다. 사실 그 당시엔 그게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였고 지금도 잔심부름 하는 것은 매니저의 업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다만 업무 시간이 아님에도 매니저를 따로 불러 심부름을 시키는 건 분명 개선돼야 할 문제”라고 꼬집었다.
2년차 매니저 C씨 역시 “매니저는 배우의 스케줄은 물론 컨디션까지 전반을 관리하는 직업이다. 배우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게 매니저의 역할이기 때문에 관리 측면에서 본다면 사적인 심부름과 공적인 심부름을 나누는 것에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오히려 공적, 사적 심부름을 구분하고 골라서 관리하는 게 더 귀찮고 성가신 일”이라고 전했다.
단순히 운전을 하고 심부름을 한다고 매니저를 ‘연예인의 집사’ 쯤으로 생각하는 시선에 대해선 경계했다. 매니저들은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순 있지만 이젠 많은 배우, 가수들도 매니저를 집사 취급하는 시대는 지났다. 스타들도 매니저를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해주고, 회사의 식구로,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조력자로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입을 모았다.
매니저 B씨는 “속된 말로 ‘운전기사’ ‘심부름꾼’으로 매니저를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매니저가 담당하는 역할이 더 전문적이고 체계화됐다. 운전을 하고, 심부름을 하는 것은 수많은 업무 중 일부에 불과하다”면서 “연예인이 최고의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데에는 매니저들의 숨은 공이 있다. 뒤에서 발로 뛰면서 일을 잡고, 스타의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어필하는 것도 모두 매니저의 역할”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과 최저임금 인상, 달라진 사회 분위기 등 업계 여건도 과거에 비해 많이 발전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년 주기로 발표하는 ‘2021 대중문화예술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매니지먼트 기획사의 매니저는 4414명에 달한다. 이들 기획업 중 소속직원과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비율은 8.0%, 구두 계약은 3.3%로 조사됐다. 지난 통계인 2019 실태조사에서 근로계약서 미작성 12.2%, 구두계약 3.3%에 비교하면 업계 환경은 개선되고 추세였다. 직업 만족도 역시 19.6%(2019년)에서 지난해 30.8%로 상승했다.
15년차 매니저 D씨는 “밥 먹듯 밤샘 촬영을 했던 과거와 달리 근로시간이 정해져 있다. 여전히 근로시간이 매니저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조금씩 개선되고 있는 건 분명하다”면서 “특히 처음 일을 시작할 땐 열정페이로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받고 일했지만 지금 회사에선 기본급에 현장수당, 휴일수당까지 받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매니저 E씨는 “주 52시간 근무제라던가, 주5일 근무 등은 사실상 촬영 현장과는 동떨어진 제도다. 물론 일을 적게 하는 건 좋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매니저는 현장에 가는 일 말고도 미팅과 사무실 업무 등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 모든 일을 하긴 불가능한 구조”라면서 “매니저가 중간에 교대하는 방식도 있지만 이처럼 비효율적인 일이 없다. 한 회사에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최근 탄력 근무제를 시도한다고 들었다. 담당 배우의 촬영에 동행하고, 촬영이 모두 끝나면 추가 시간에 따른 유급 휴가를 주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는 “매니저와 연예인은 업무상 가장 가까운 사이다. 상호간의 지켜야 할 것이 있고 약속에 의해 진행 되었던 것이 신뢰가 깨져 일어나는 일들이 많다”면서 “이러한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매니저와 연예인간에 서로가 타당한 합의점을 찾아야 하며, 매니저들의 업무 환경 실태조사와 연예인의 목소리가 함께 맞춰서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더해 “매니저들의 처우 개선 대책 마련과 더불어 연예기획사와 매니저간의 합리적이고 체계화된 근로계약 규정을 정립해 매니저가 보다 나은 환경에서 연예인들의 연예활동 지원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업무환경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