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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12>] 과호흡 증후군


입력 2022.06.10 14:13 수정 2022.06.14 10:54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12화 과호흡 증후군


정수진은 작년에 김석규가 이사했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직 들르지 못했는데 만약 오늘 방문하게 된다면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화장지나 식용유 같은 걸 사갈 수도 없고 어쨌든 미처 계획에 없던 일정으로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이대로 종전선언을 할 거예요?”


야심차게 구사한 작전 ‘신의 한수’가 차질을 빚을 조짐이 보이자 김석규가 하이에나처럼 비굴한 눈빛을 발사하며 반문했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닌다는 하이에나. 김석규는 추접스런 하이에나가 되더라도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현 상황을 벗어나는 순간 교전 재개의 꿈은 수포로 돌아갈 확률이 크기 때문이었다. 박미옥이 말은 못하고 정수진의 현명한 결정을 기다린다는 듯 자꾸만 눈을 끔벅거렸다.


잠시 고민하던 정수진이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었다. 박미옥의 시선은 정수진에게 포기를 종용했지만 그녀의 교전 재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정수진은 맥주군과의 전투가 성에 차지 않아 내심 재 개전을 꿈꾸던 참이었다. 만약 김석규의 제안이 없었다면 정수진은 귀가해서라도 남부끄럽지 않은 부부 전사가 될 작정이었다.


김석규의 아파트로 이동하기 전 정수진이 미리 교전 상대로 소주군을 단독 지명하고 적의 지원무기로는 닭찜을 호출했다. 작전명 조류독감 퇴치작전은 정수진의 스마트폰을 통해 예하 치킨센터에 긴급 하달되었다. 박미옥이 중간에서 전쟁만은 막아보려 눈살도 찌푸려보고 별의별 안간힘을 써봤지만 오랜만에 만난 정수진의 참전이 막판 변수로 작용하여 재 개전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군들이 아파트에 주둔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의 주력부대와 지원무기가 속속 입성했다. 배달의 민족, 배달공화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신속배달이었다. 정수진은 금산주꾸미 전투에서 소극적이었던 것이 전우들에게 너무 미안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소주군을 저격해대기 시작했다. 원샷 원킬의 예술적인 감각이 장착된 정수진의 맹활약으로 적 1개 소대가 순식간에 전멸하고 말았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김석규가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김석규는 언제부턴가 양상사 혹은 주상사의 레퍼토리를 따라하고 있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김석규에게서 시작된 노래는 임봉식으로 이어졌고, 정수진은 가사도 잘 모르면서 자신 역시 군인이라며 억지로 따라 불렀다.


그러자 적의 소주 병력이 결사항전, 옥쇄투쟁을 외치며 안전핀을 뽑아들고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했다. 아예 병나발을 불라는 시위에 다름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자살폭탄조의 투입으로 전황이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었다. 군 미필자인 박미옥은 후방 안전지대에서 지우와 보해를 데리고 오렌지주스를 마셔가며 시시각각 전해지는 전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당장에라도 그로기 상태가 된다한들 하등 이상할 것 없는 김석규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어느덧 2개 소대 병력을 잃어버린 적의 주력군은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그렇다고 패주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닭찜의 눈물겨운 지원을 받으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박미옥은 알카에다처럼 아예 뚜껑을 딴 채 진격하는 소주군의 자살폭탄에 자못 아군의 방어선이 무너질까 염려됐다. 하지만 비무장 민간인이 전선에 나서봤자 총알받이 말고는 할 게 없어서 박미옥은 손에 주스 잔을 쥐고 소주군의 공세가 누그러지기만 학수고대했다.


박미옥의 기대와 달리 전황은 백중세에서 소주군의 우세 쪽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임봉식 부부가 부창부수로 선방하는 와중에 별안간 김석규의 눈이 풀리고 코가 삐뚤어지는 악재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박미옥이 뒤늦게 과일과 식수 보급로를 확보해서 지원에 나서보았지만 김석규는 회복불능 상태에 빠지며 처참하게 무너졌다. 결국 거실바닥은 김석규가 고주망태의 온몸으로 그린 큰 대자가 차지하고 말았다.


이튿날 김석규는 기상 시간이 지났는데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마침 부산 서면의 한 예식장에서 열리는 조카 결혼식에 가야 하는 날이었다. 더욱이 강주에서 참석하지 못하는 친지들의 축의금 봉투를 몽땅 걷어서 대표로 참석하겠다고 큰 소리를 땅땅 친 연후였기에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가야만 할 길이었다. 박미옥이 도끼눈을 하고 얼음장 같은 손을 써서 깨우자 김석규는 패전의 후유증에 끙끙 앓아가며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김석규가 간신히 부산까지 운전해 와서 건물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예식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타워에 들어섰을 때였다. 불현듯 전쟁후유증으로 일컬어지는 과호흡 증후군의 전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필이면 박미옥이 딸 지우를 데리고 화장실에 간 사이였다. 과호흡 증후군이란 산소의 과다 공급으로 몸 안에 이산화탄소가 부족해져서 생기는 병이었다. 증세로는 호흡곤란에 사지 마비가 오고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었다. 스트레스와 불안심리가 주요인이긴 하지만 격렬한 전투 등으로 몸이 피폐해질 경우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김석규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가누며 호흡량과 횟수를 줄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숨을 참아 산소의 유입을 막으면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비율이 적정하게 조절되면서 증상이 호전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 몸이 산수책(算數冊)처럼 그렇게 교과서적으로 작동되지는 않았다. 호흡을 줄이려 할수록 불안감이 커지면서 숨은 막힐 것 같고, 그렇다고 마음대로 숨을 쉬자니 오히려 산소량이 많아지면서 마비가 올 것처럼 몸이 뻣뻣해졌다.


만약 결혼식장에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김석규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119 구급대원들이 요란하게 진입한다면 남의 결혼식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김석규는 어린 시절 멱 감을 때 누가 제일 오래 물속에서 숨을 참는지 내기하는 것처럼 한번 버텨보기로 했다. 하지만 김석규의 폐활량으로는 금세 숨통을 틔우지 않을 수 없었다. 호흡을 해도 호흡을 하지 않아도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김석규는 조난당한 사람이 음식물을 아끼듯 그렇게 조금씩 호흡을 아껴가며 숨을 쉬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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