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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34>] 햇빛 아래 술


입력 2022.08.26 14:36 수정 2022.08.26 14:37        데스크 (desk@dailian.co.kr)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34화 햇빛 아래 술


이튿날 한종탁은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사무실에 출근했다. 이런 상태는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 그건 바로 음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거의 낮술 중이라고 보아도 무방해서 이런 때는 혼자서라도 술을 먹고 싶어 환장하는지라 누군가 슬쩍 건드려 주기만 해도 순풍에 돛단 듯 술집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출장 가자.”


근무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염 부장이 말했다. 요즘 전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그런지 자리를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종탁은 염불엔 관심 없고 오로지 젯밥에만 신경 쓰는 땡추중처럼 해장술을 고대하며 염 부장을 따라나섰다.


“거래처 가기 전에 막걸리부터 한잔하죠.”


“아침부터?”


“해장술이니까요.”


염 부장은 군말 없이 중앙시장으로 차를 몰았다.


“강주식당으로 가보자.”


“거긴 막걸리가 없잖아요. 산청식당으로 가죠.”


“사 달라 그러면 돼.”


두 사람이 후정 별채 자그마한 방 하나에 자리 잡고 앉으니 조금은 귀찮아하는 기색의 중년여성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아직 개시 전이라 표정이 그런가 싶어 언짢았지만 종업원의 입장이 되고 본다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비빔밥 둘에 막걸리 한 통.”


“막걸리는 없는데요. 소주 드리면 안돼요?”


염 부장이 가늘게 쭉 찢어진 눈매로 훑어보며 반말 투로 주문하자 여성 역시 성의 없이 대꾸했다. 염 부장이 정색하고 나섰다.


“좀 사다 주세요!”


“아니 그냥 소주 주세요. 소주 마시면 됩니다.”


염 부장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한종탁은 괜스레 중년여성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막걸리 생각을 철회했다.


“그래도 되겠어? 막걸리 마신다면서.”


“괜찮아요. 어차피 해장할 건데요, 뭐.”


그랬다. 한종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막걸리를 마셔야겠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진 게 아니라 그저 해장술을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카, 좋다!”


한종탁이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탄성을 지르자 후정 화단에 심겨진 배롱나무가 진분홍 꽃가지를 흔드는 듯 보였다. 한종탁은 비빔밥에 따라 나온 선지국물을 한 숟갈 떠서 입 안에 넣었다.


“아침부터 그게 넘어 가냐?”


염 부장은 술 마시는 한종탁의 모습만 보아도 속에서 신물이 넘어오는지 잔뜩 인상을 구겼다. 한종탁이 아랑곳하지 않고 소주 한 병을 깨끗이 다 비웠다. 술이 물 같다고나 할까.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으로만 따진다면 물보다 술이 한결 수월했다. 양지바른 후정의 백일홍도 더없이 예뻐 보였다. 한종탁은 내친김에 한 병 더 시킬까 하다가 나중을 생각해서 아껴두기로 했다.


염 부장이 거래처에 들렀을 때 한종탁은 뒤따라가지 않고 에어컨을 틀어놓은 차에서 다리를 쭉 뻗어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쉬었다. 해장술을 먹은 게 아무래도 취할 듯해서 어떡하든 술을 깨야 했기 때문이다. 맛 칼럼니스트에겐 위장이 채워지는 게 치명적이지만 술꾼에겐 만취하는 게 치명적인데 위가 차면 음식을 먹지 못하듯 만취하면 더 이상 술을 마시지 못하니까 수위조절이 필요했다.


염 부장은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한종탁은 시원한 차 안에서 꽤 깊은 단잠에 빠졌던 것 같았다. 취기가 제법 가라앉아 있었다. 점심약속은 염 부장이 미리 동료직원과 하동복집으로 잡아놓았다고 했다. 한종탁은 시원한 복국과 컬컬한 막걸리를 떠올리며 염 부장 뒤를 졸졸 따라 걸었다. 하동복집에서 한종탁은 밥과 복일랑 마다하고 막걸리에 국물만을 쪽 따라 마셨다. 불현듯 배가 빵빵해졌다.


지난밤부터 계속된 음주로 술 수위가 상당했기에 한종탁은 막걸리만으로도 거의 만수위에 이른 것 같았다. 급기야 두뇌가 통제범위를 벗어나서 생각과 사고가 걸러지지 않은 채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사장님.”


한종탁의 부름에 사장보다도 염 부장이 먼저 반응했다.


“사장은 왜?”


“오늘 내가 기분 좋아서 한턱 쏘려고 합니다.”


“취했냐?”


“취하긴요. 멀쩡합니다.”


한종탁은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며 윙크를 했다.


“사장님. 여기 계신 손님들께 막걸리 한통씩 돌리세요. 오늘 내가 한잔 쏩니다, 흐.”

사장이 다가오자 한종탁은 실내에 앉은 서너 명의 손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됐습니다. 그냥 두세요. 이 친구 취했습니다.”


염 부장이 사장을 만류하자 한종탁이 대뜸 화를 냈다.


“돈은 내가 냅니다.”


“누가 돈 때문에 그러냐?”


“아, 됐습니다. 막걸리는 제가 한잔씩 돌리죠.”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자 당황한 사장이 무마에 나섰다. 한종탁은 사장의 발언이 불쾌했지만 염 부장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더 이상의 낮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고집을 꺾었다. 즉흥적인 말과 행동이란 게 조절이 되면 유쾌한 퍼포먼스가 되지만 도가 지나치면 주정이 되고 마는데 한종탁은 마치 외줄 타는 광대처럼 아슬아슬하게 그 경계를 잘 지켜내고 있었다.


오후에 거래처 한 군데를 더 도는 동안 여전히 한종탁은 팽팽하게 당겨진 외줄 같은 그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대뇌에서 입까지의 거리는 정말이지 물리적인 거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야구연습장의 피칭기계에서 공이 튀어나오듯 말이 툭툭 불거지는데 소재는 낮술이었다. 술에 있어서는 한종탁보다 일가견이 한참 더 있을, 일년 삼백육십오일 중에 삼백육십일은 술을 먹는다는 염 부장 앞에서 말이다.


낮술은 치명적이다. 오죽하면 부모도 몰라본다 했을까. 그만큼 혀끝에 감기는 맛이 달디 달다. 낮술은 알코올이 혈액으로 스며드는 시간을 단축시킨다. 찬란하게 빛나는 햇빛 때문이다. 고요한 달빛은 술을 은근히 받아들이라 하지만 햇빛은 그야말로 거침없다. 술은 원래 달빛 아래서 먹는 음식이기에 그렇다. 햇빛 아래 술을 마신다는 것은 거역이다, 반항이다. 낮술은 미시적으로는 일탈이요 궁극적으로는 반체제행위다.


“그래서 낮술은 예술가들이 즐겨하는 것이죠. 예술가들은 생리적으로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존재거든요.”


“그럼 낮술 좋아하면 다 예술가겠네? 우리 회사 강 팀장처럼 말이야.”


염 부장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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