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64화 회유
김석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농성 만류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박미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제껏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적극 지지해왔던 아내였기에 조금 전의 말은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술 끊은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이렇게 금주운동까지 이끌어온 당신이 난 너무 자랑스러워. 하지만 이제 할 만큼 했으니까 금주운동은 언론과 정치권에 맡겨두고 당신은 전처럼 강사로, 상담가로 활동했으면 해.”
“지지하고 성원한다고 해준 게 언젠데 이제 와서 관두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김석규가 나직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농성으로 기력이 떨어져 화를 낼 힘도 없었다. 박미옥은 김석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다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뭔가 하고픈 말이 있는 듯 간절한 눈빛이었다. 문득 박미옥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당신 무슨 일 있지? 말해봐, 무슨 일이야!”
김석규가 갑작스런 박미옥의 눈물에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농성장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김석규 부부에게로 쏠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이철백이 호들갑스러운 손짓으로 목청을 낮추라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냈다. 김석규는 주춤주춤 일어나 박미옥을 데리고 대한문 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야, 당신. 말해봐. 당신 얘기 들어보고 계속하든 말든 결정할 테니까.”
김석규가 천천히 걸으며 조용하게 물어보았다. 두 사람의 뒤에 정보경찰 한 명이 바짝 따라붙었고 그 곁에서 이철백이 함께 걸었다. 김석규가 농성하는 동안 이철백과 정보경찰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시나브로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당신에겐 미안한데….”
“미안해하지 말고 말해 봐. 무슨 일 있었지?”
“그런 건 묻지 말고 그냥 내 말대로 해 줘. 부탁이야.”
박미옥이 돌담길에 멈춰 서서 애원조로 말했다. 김석규는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아내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박미옥이 고삐를 죄듯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정도 한 것만 해도 당신 정말 대단한 거야. 금주를 이슈화 시킨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당신, 할 만큼 했으니까 금주운동은 언론과 정치권에 맡겨. 그리고 이제 나 좀 편하게 해줘. 여보, 응?”
“대체 무슨 일이야. 말해 봐, 무슨 일인지.”
“그냥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나 좀 편하게 해주면 안 될까? 난 당신이 어찌될까봐 너무 무서워.”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말을 해봐. 그래야 내가 판단할 거 아냐.”
“그만 내려가 볼게.”
김석규의 거듭된 재촉에 박미옥이 힘없이 발길을 돌렸다. 김석규가 부리나케 달려가 박미옥을 멈춰 세웠지만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듯 묵묵히 가던 길을 재촉했다. 김석규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건 분명해 보이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혼란스러웠다. 든든한 내조자 박미옥이 지금처럼 자신에게 애원조로 부탁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김석규는 농성장으로 되돌아오면서 임봉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박미옥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임봉식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모양이었고 최근 들어 박미옥의 낯빛이 유난히 어두웠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것도 김석규 때문에 걱정이 되어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김석규는 이제껏 박미옥를 위하여 뭔가 해준 게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거두절미하고 아내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면 그것 역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젊어서는 문학한답시고 걸핏하면 술이나 퍼마시고, 또한 잠복근무가 일상인 형사생활과 그로 인한 음주생활로 무던히도 아내의 속을 썩인 걸 감안하면 그건 백번 지당한 일이었다. 김석규는 농성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박미옥이 애원하는 눈빛을 거두지 못하고 힘없이 발길을 돌리던 뒷모습을 물끄러미 떠올렸다.
농성장의 밤은 깊어갔고 침낭 안에 몸을 말아 넣은 사람들이 코를 골았다. 김석규는 이철백이 드러누운 자리 옆에 가부좌를 틀고 홀로 명상에 잠겨있었다. 눈을 감고 귀를 열어 두고 있으니 홀연히 도심 속에서도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김석규는 어려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게오르규가 언급한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최소한 정의와 부조리를 구분해 내는 작가적 양심을 바로미터로 삼아 위기를 극복하곤 했다.
비록 지역문예지 출신의 무명작가이긴 하나 김석규는 작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작가적 양심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경험적으로 알게 된, 과음으로 인한 사회적 약자들의 피폐한 삶, 그 가족들의 지옥 같은 삶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게 금주운동으로 이어져 온 것이었다.
농성장 천막에 앉아 김석규가 가부좌를 튼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풀벌레도 잠든 깊고 적막한 밤이었다. 김석규는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냐?”
이른 아침 해장국을 먹으며 김석규가 물었다. 이철백은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니라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김석규가 다시 물었다.
“이게 야당 의원이나 시민사회 사람들과 상의할 일은 아니지?”
“네가 그 사람들 때문에 금주운동 시작했냐? 그 사람들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달랑 얹은 거니까 염두에 두지 마.”
“물론 그 사람들도 내가 필요했겠지만 나 역시 금주운동을 불붙이는 데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건 부인할 수 없어.”
“이거 어디 기관에서 미옥 씨에게 작업한 거 아냐?”
“나도 그런 의심이 들긴 해.”
김석규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나도 네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미옥 씨 말마따나 이건 어느 누구도 못했던 일이야. 금주운동이란 걸 만들어낸 자체가 정말 대단한 거야. 여기서 중단한다고 해도 너를 욕할 사람은 대한민국에 하나도 없어!”
이철백의 강한 어조에 김석규가 고개를 들었다.
“미옥 씨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의미 있고 작가적 양심 지키는 것도 다 의미 있는 일이야. 전에도 나는 너의 금주 마인드에 반대하지만 네가 부당하게 탄압 받는다면 너를 위해 싸우겠다고 말했지?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던지 난 네 편이란 것만 알아둬.”
“고맙다, 철백아.”
“고맙긴. 난 널 케어해주는 영원한 매니저잖아.”
이철백이 앙증맞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문득 해장국 집 미닫이 문틈 사이로 시원한 가을바람이 밀고 들어왔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