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봉꾼 남편 바람기 재운 천안 개목마을 남근석

최진연 문화유적전문기자

입력 2014.09.13 22:25  수정 2014.09.13 22:34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남근석을 찾아서>개발에 밀려 봉서산에 옮겨져

봉서산(158m)은 옛 부터 봉황이 깃들어 살았던 산이라 해 그렇게 부르고 있다.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천안 서부지역에서는 봉서산이 유일한 녹지지대가 되었다. 산 곳곳에는 야생화와 조경수를 심어 도심의 자연생태 학습장을 조성했다. 특히 봉서산 동쪽기슭에는 석기․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돌도끼 등이 출토되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봉서산 체육공원 등산로길 옆에는 키가 크고 작은 남근석 2기가 세워져 있다. 큰 것은 높이가 1.7m 정도로 아래서부터 위로 갈수록 좁아지며, 미끈하게 뽐내고 있다. 전체가 자연석으로 남자의 성기를 빼닮았다. 머리 부분의 귀두와 힘줄은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 하늘로 향해 세웠다. 이른바 남성의 힘을 상징한 것이다. 작은 남근석은 2.2m 남짓한데 수습은 듯한 모습이다. 남근석 앞에는 제물을 차리는 제단석을 만들어 놓았다.

신비한 영험을 가진 천안 개목마을 남근석ⓒ최진연 기자

키 큰 남근석은 원래 산 아래 개목마을에 있었다. 이 마을은 천안에서 아산으로 가는 길목이다. 마을생김새가 마치 개미의 목처럼 생겼다 해 개목마을이 불러지고 있다. 개목마을은 천안지역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형성과정은 선사시대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아산만 바닷가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천안지역의 곡식이 물물 교환되는 장소였다.

개목마을에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지자 주막거리가 생겨 쾌나 흥청대던 곳이었다. 마을 어귀에는 주막거리만큼이나 유명세가 붙은 남근석이 우뚝 서서 많은 주객들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 이 남근석이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득한 옛날부터 남아선호사상과 풍요사회를 기원하는 표식이다. 특히 중국․인도․한국 등이 남자아이를 선호했다.

이런 토속신앙 유구에는 치성을 드리려는 사람들이 남의 시선을 피해 찾아들었다. 전해지는 애기로는 오래전 개목마을에 살던 한 부부가 딸 여섯을 두었다. 부인이 일곱 번째 임신을 해 출산일이 다가오자 남편은 천안으로 약을 지으러 가는 길에 남근석 옆에 서 있던 버드나무가 강풍에 넘어져 길을 가로막았다. 그는 불길한 생각을 하면서도 나무를 타고 넘어가 약을 지어 왔는데 그만 부인이 사산을 하고 말았다. 그날 이후 부부는 새벽에 정성껏 남근석에 치성을 드렸다. 신기하게도 몇 달 후 부인은 또 임신을 해 아들을 낳았다.

또 다른 얘기는 어느 아낙네가 남편이 바람기가 너무 심해 남편의 성기를 해치는 대신 이 남근석을 자기남편 것으로 생각하고 머리 부분을 정으로 조아 돌조각을 삶아 남편에게 먹였더니 이상하게도 난봉꾼의 바람기가 잦아들어 가정이 편안해 졌다고 했다.

소문은 천안일대는 물론 충남지역까지 퍼졌다. 그 후 새벽이면 여인네들이 몰려들어 남근석 훼손이 심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순찰을 돌며 남근석을 지켰다. 남근석자리는 현재 주유소가 있는 자리다. 매년정초에 제를 올렸는데 남자보다 남근석을 돌보는 것은 부인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한다.

이 남근석은 3백 년 전 봉서산 동쪽아래 어느 절터에서 개목마을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일제 때는 일본인이 반출하려다가 한겨울임에도 2일 동안 폭우가 쏟아져 하늘의 도움으로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남근석은 천안시가 확장될 때 개목마을이 개발되자 잠시 천안시청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천안삼거리로 옮겨졌다. 그해 개목마을에서는 흉사가 닥쳤다. 20대 청년들이 비명에 갔다. 마을사람들은 시청에 남근석을 제자리로 옮겨달라고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다시 제자리에 갈수가 없어 1992년에 천안시청 옆 봉서산으로 옮겨졌다. 현재 남근석은 다른 곳에 있던 남근석과 함께 평온을 유지하며 천안의 명물이 됐다.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