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 45>아폴론에 봉헌된 델로스의 예술작품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신성한 호수,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탄생지
델로스 섬은 그리스인들의 성지(聖地)이다. 델로스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섬이다. 아리스토파네스도 <구름>에서 델로스에서 태어난 이 두 남매를 노래한 바 있다. 델로스는 그만큼 그리스인에게 친숙한 곳이다. 또 하나의 정신적 지주였던 셈이다.
“이리 오소서
퀸토스 산의 우뚝 솟은 암벽 위에
군림하시는 포이보스여, 델로스의 주인이여,
뤼디아의 처녀들이 그대를 진심으로 경배하는
에페소스의 순금 신전에 사시는 축복받은 여신이여.“
황량한 섬 델로스는 제우스의 자식 중 영명하고 재주 많은 두 쌍둥이 남매를 탄생시킴으로써 신성한 땅이 되었다. 레토가 이들 남매를 해산한 곳은 델로스 섬의 작은 호숫가였다. 그래서 이 작은 호수는 신성한 호수(Sacres Lake)로 불리게 된다. 델로스가 또 하나의 그리스 신화의 탄생지이자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이다.
19세기에 활약한 풍경화가 카를 로트만은 그리스의 중요 문화유산을 여러 점의 풍경화로 남겼다. 그 가운데 델로스의 섬을 묘사한 작품도 있다. 그는 퀸토스 산과 신성한 호수, 그리고 이미 폐허가 된 황량한 델로스의 황혼을 실감나게 그렸다. 신성한 호수는 고인 물에서 발생하는 바이러스와 전염병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메워지고 지금은 수풀과 관목이 뒤덮고 있다. 그 인근에 우물로 쓰던 곳은 복원 보존되고 있다.
열네 명의 자식 자랑으로 신을 조롱한 니오베의 비극
제우스의 자식들은 꽤 많았다. 정실 아내 헤라가 낳은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 전쟁의 신 아레스, 젊음의 신 헤베, 불화(不和)의 신 에리스 이외에도 다른 여신들이나 인간 여인들과의 사랑에서 얻은 자식들이 많았다. 무려 삼십 명이 넘는다. 그 가운데 여신 레토가 낳은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메티스가 낳은 아테나, 마이아가 낳은 헤르메스, 아프로디테가 낳은 에로스가 큰 숭배를 받았다. 그리고 인간 여인인 세멜레가 낳은 디오뉘소스, 다나에가 낳은 페르세우스, 알크메네가 낳은 헤라클레스는 각각 반신(半神)으로 그리스인들의 지극한 사랑은 받았다. 그리스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 이들은 바로 제우스가 낳은 신과 영웅들이었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그 가운데에서도 으뜸으로 숭상되던 신이었다. 그러니 이들 남매를 낳은 레토의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남매를 키우는 일은 매우 험난한 일이었다. 레토는 제우스의 정실 부인 헤라의 질투를 받아 늘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레토가 출산할 수 있도록 제우스가 섬을 떠오르게 하여 간신히 델로스의 신성한 호숫가에서 해산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 편안하게 남매를 키울 환경은 만들어주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레토는 헤라의 질투로 인한 해코지를 걱정하며 늘 불안하게 살아야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레토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다 목이 말라 어느 연못에 이르러 물을 마시려 했다. 그런데 헤라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레토가 물을 마시지 못하도록 연못의 물을 휘저어 흙탕물을 만들었다. 맑은 물을 마시려는 레토에게 이들이 계속 심술을 부리자 참다못한 레토는 이들을 개구리로 만들어 버렸다.
레토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두 남매를 훌륭히 길러냈다. 아폴론은 지혜의 신이자, 음악의 신, 예언의 신으로 성장했고,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처녀로 살기로 작정한 아르테미스는 사냥의 신으로 들판을 누볐다.
그런데 어느 날 레토와 두 남매를 격분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신을 노엽게 한 사람은 테바이의 왕비인 니오베였다. 그녀는 제우스가 여신 플루토 사이에서 낳은 탄탈로스의 딸이었고, 당시 테바이의 왕 암피온의 아내로 아들 일곱과 딸 일곱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늘 자신의 아름다움과 열네 명의 훌륭한 자식들을 자랑하며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행복을 마음속으로 혼자만 누렸다면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행복을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또 이를 재삼 확인받고 싶었다.
그런데 테바이에서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딸 만토가 여인들에게 레토와 그녀의 자식인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여신을 경배하라고 권고한 적이 있었다. 때마침 테바이의 여인들이 레토와 두 남매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경배 의식을 준비하고 있던 광경을 니오베가 목격한다. 그녀는 자신 또한 신의 자식이고 늠름하고 아름다운 아들딸을 열네 명이나 갖고 있는 자신이 겨우 두 자식을 둔 레토보다 휠씬 더 행복한 사람이라며 오히려 자신을 찬양해야 된다며 여인들의 레토 여신 경배 의식을 못하게 훼방했다.
인간 니오베에게 모욕을 당한 레토는 이 일을 두 남매에게 전해주며 이들의 복수를 부추겼다. 레토가 당한 치욕감은 컸을 것이다. 헤라가 심술을 부리는 바람에 자신이 두 남매를 낳고 키우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던가. 왕실에서 유모들에 의해 편하게 자랐을 니오베의 자식들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필멸의 인간이 자식을 아무리 많이 두었기로서니 어찌 불멸의 신의 자식에 견줄 수 있을 것인가.
어머니와 자신들을 업신여긴 니오베에게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철저한 응징을 한다. 니오베가 자랑으로 삼던 열네 명의 자식들을 모두 활로 쏘아 죽여 버렸다. “하나만은 남겨주오!” 니오베가 울며불며 마지막 딸과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니오베의 오만(hybris)이 자식들의 급사(急死)라는 비극을 자초한 것이다.
한 순간에 열네 명의 자식을 잃은 니오베는 슬픔을 못 이겨 차디찬 돌이 되어갔다. 그 때 한 바탕 돌풍이 불어 그녀를 말아 올려 그녀의 고향인 뤼디아의 산중으로 던져 버렸다. 오늘날까지 시퓔로스 산의 마루턱에 바위로 서 있게 된 그녀는 아직도 애절하게 울고 있다고 한다. 신을 조롱하고 멸시한 인간의 오만은 언제든지 징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그리스 신화의 여러 대목이 확인시켜 준다. 분수를 넘는 질투와 오만한 행동은 자신을 파멸시킨다.
니오베의 교만이 부른 비극을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이를 묘사한 작품이 탄생했을 것이다. 인간들을 경계하기 위해 델로스의 레토 신전 또는 아폴론 신전이나 아르테미스 신전에 봉헌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발견은 크레타 섬에서 이루어졌다. 필자가 2014년 2월 크레타 섬의 이라클레온 고고학 박물관을 관람할 때 니오베의 징벌을 묘사한 희귀한 작품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묘사한 작품은 대개 주인공 한 사람을 단일 작품으로 조각하거나 박공이나 프리즈에 여러 장면을 이어 부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니오베의 자식들을 활을 쏘아 죽이려는 아르테미스의 조각과 자식을 감싸며 살리려는 니오베의 조각을 각각 만들고 마주 보는 한 쌍의 작품으로 완성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와 관련하여 이렇게 두 조각 작품이 연관된 하나의 스토리로 전하는 방식의 작품은 처음 본다. 매우 독특하고 희귀한 작품이다.
오만한 니오베를 응징하기 위해 니오베의 딸을 활로 겨냥하는 아르테미스의 분노에 차서 입을 앙다문 모습과 자비를 베풀기를 바라는 듯 아르테미스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몸을 움츠려 딸을 감싸는 니오베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묘사되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원작이 그리스 최고의 조각가였던 프락시탈레스나 스파코스의 작품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잡는다. 그런데 니오베를 응징하는 작품이 왜 크레타에 있는 것일까? 아마 이 작품은 델로스에 있는 어느 신전에 있었을 것이고, 여러 복제품이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도시로 흘러갔을 것 같다.
신에게 봉헌된 예술작품들
신들의 섬 델로스에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경배하는 많은 이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숱한 봉헌물들이 바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대부분 약탈되고 소실되었다. 지금 전해진 작품들은 델로스가 번성했던 시대에 델로스 섬에 산재했던 예술작품과 보물들의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몇몇 탁월한 작품들이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과 델로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다.
먼저 델로스 섬의 주인이기도 한 아르테미스 여신상과 아프로디테상이 최고급 파리안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그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기원전 1세기의 원작 작품들이다.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에 활약하던 피디아스, 프렉시탈레스와 같은 조각의 거장들의 기량이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지배 아래의 그리스 조각가들에게 계속 전수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델로스의 여러 신전이나 공공건물, 거부들의 대저택에는 올림포스 신뿐만 아니라, 님프와 다양한 신과 영웅들의 조상이 넘쳐났을 것 같다. 델로스를 경배하는 그리스 세계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다양한 봉헌물을 보내왔을 것이다. 또 봉헌된 보물과 예술작품들이 델로스인들의 예술적 취향과 안목을 높여주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거부들의 저택들은 봉헌물과 유사한 예술작품들로 치장하는 것이 교양인의 덕목인양 유행되었을 것 같다.
실제로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1872년부터 델로스 섬이 발굴되면서 각종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옛 델로스 시가지에 흩어져 있던 대저택들에서 발굴되었다.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이런 저택들에 발굴된 유물의 종류나 특징을 따서 이름이 붙여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돌핀의 집’이나 ‘마스크의 집’으로 불린 것들이 그런 예이다.
델로스 섬의 또 다른 주인 아폴론에게 바쳐진 예술작품도 많았을 것이다. 현존하는 것 중에 갈라타(Galata) 방패를 밟고 있는 아폴론 대리석 상이 있다. 이 작품은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기원전 241년~기원전 197년)가 갈라티아족(갈리아인으로도 불렸다. 아나톨리아 중부에 정착한 켈트족의 일파이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에 헌정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탈로스 1세는 이 전쟁의 여세를 몰아 아나톨리아 지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를 일시적으로 장악하는 등 세력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또 아탈로스 1세는 예술 진흥에 남달리 관심을 많이 기울인 왕이었던 만큼 그가 아폴론 상을 조상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크게 어긋나지 않을 듯싶다. 아탈로스 1세는 갈라티아족과의 전승 기념으로 <죽어가는 갈리아인>이란 예술작품을 만든 적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그리스 조각 예술의 최고 걸작의 하나로 손꼽힌다. 전사의 나신이 정교하게 조상되었다. 아폴론 상 역시 이 작품과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델로스에는 전차 경주장인 히포드롬과 육상경기와 올림픽의 여러 종목 경기를 할 수 있는 스타디온, 그리고 운동선수들이 훈련을 할 수 있는 체육장 팔라에스트라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425년에 전차 경주가 창설되었다. 델로스에서는 이런 체육 시설을 활용하여 부정기적인 체육 제전이 개최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올림피아 성역처럼 스포츠 제전에서 우승하는 영웅들의 대리석상도 세워졌을 듯싶다. 현존하는 한 스포츠 선수의 대리석 상이 이를 잘 말해준다. <디아두메노스(Diadumenos) 상>이 바로 그것이다. 우승자를 표시하는 머리띠인 ‘디아데마’를 두른 청년상이다. 오랜 수련으로 다듬어진 균형 잡힌 몸매를 아름다운 조각으로 형상화한 걸작이다. 기원전 540~425년 경 그리스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가 청동상으로 제작한 원작을 로마 시대에 대리석으로 복제한 작품이다.
특이한 작품도 있다. 실레노스(Silenos) 상이다. 이 작품은 델로스의 디오뉘소스 신전에서 발굴되었다. 실레노스는 디오뉘소스의 양부(養父)이자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얼굴이 매우 못생겨 소크라테스를 놀릴 때 실레노스를 닮았다고 비유되곤 했던 인물이다. 그는 자주 술에 취해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실레노스를 프뤼기아의 농부들이 사로잡아 미다스 왕에게 데려갔던 이야기가 나온다. 미다스 왕은 실레노스가 디오뉘소스 비의(秘儀)에 참가한 것임을 알아보고 열흘 동안 잔치를 벌이고 잘 대접했다가 디오뉘소스에게 돌려주었다. 디오뉘소스는 자신의 양부를 잘 돌봐준 대가로 왕에게 소원을 말하게 했다. 왕은 “내 몸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누런 황금이 되게 해주소서!”라고 소망했다.
무엇이든 황금이 되게 만든 ‘미다스의 손’ 설화가 만들어진 게 바로 실레노스와 연관되었던 것이다. 소원을 이루게 된 왕은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신시키며 환희를 맛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극한의 고통을 야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어떤 것도 먹고 마실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진수성찬도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이빨에 황금 조각이 씹혔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탐욕에 사로잡혔던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다. 그는 신에게 과욕의 죄를 빌어 용서 받고 나서야 간신히 보통의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스인의 성지 국제도시 델로스는 아테네인들에게 더욱 특별한 곳이었다.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5세기에 델로스는 아테네 동맹의 본부가 있던 국제도시였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기원전 431년~ 404년) 전쟁이 끝난 이후까지도 델로스에 해마다 제의 사절단을 보냈고 그 제의를 신성하게 여겼다.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 사형 선고를 받고 곧바로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은 델로스로 떠난 사절단이 바다 풍랑이 심해 한동안 귀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델로스의 제의 사절단이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 안전하게 귀국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사형집행이나 불경스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시의 불문율이었다. 그만큼 아테네인들이 델로스의 신성성을 그때까지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아무튼 그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한 달여 동안 감옥에서 친구들과 철학을 논하는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었다.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영혼 불멸에 대해 강론한 내용을 담은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Phaidon)은 그렇게 해서 태어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아테네는 인류 최고의 현인을 잃었다. 이로써 아테네와 델로스의 운명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델로스를 통해 부흥했던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과 함께 쇠락했고, 신성한 섬 델로스 역시 그 경건한 위엄을 잃게 되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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