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신영복 교수 일가, 현재 북에서 살뻔 했다
'베트남공관원 석방교섭회담'서 북, 신영복 송환 요구
우리 정부 반대하자 "가족과 함께 인도해달라" 제안도
'베트남억류공관원 석방교섭회담'에 북이 끈질기게 요구한 송환 요구 8명 가운데 신영복 교수도
북한이 소주 '처음처럼'의 문구로 잘 알려진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를 지난 1975년 월남패망 당시 억류됐던 한국 외교관 3명과의 석방협상에서 교환대상으로 지목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2016년 일반 공개결정으로 외교사료관에 소장돼 있는 '베트남억류공관원 석방교섭회담' 문서철(1977~1979 당시 외무부 동남아과 생산)에 따르면 북한은 회담 내내 시종일관 한국 외교관 3인에 대한 교환 대상으로 남한에 수감돼 있는 '혁명가'들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자국민보호원칙을 고수하며 남한 출신은 인도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1978년 7월부터 인도 뉴델리에서 협상을 시작한 남북은 한국 외교관 1인과 북한이 요구하는 7인의 인원을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북한이 제시한 21명은 이미 사형을 집행한 13명과 미전향 무기수 2명, 전향무기수 5명, 전향 유기수 1명으로 전원 남한출신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통일혁명당 사건 등 공안 및 간첩 사건에 개입한 인물들로 북한에서는 이들을 '혁명가'라고 지칭했다. 이 가운데 신영복 교수가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혁명가'들을 북으로 데리고 가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할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평양(김일성)은 석방협상의 북한 대표자들에게 북한이 제시한 21명 가운데 생존해 있는 8명의 혁명가를 반드시 교환 명단에 넣으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베트남억류공관원 석방교섭회담'에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우리 정부는 교환 대상 선정기준으로 △송환으로 인해 이산가족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점 △북한 출신의 인사여야 한다는 점 △사형수 및 무기수에 송환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점 등을 세우면서 북한의 제안을 거절했다.
우리 정부가 "남한 출신의 인사들은 인도주의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다"며 끝내 거절하자 북측 대표자는 비공개 회의를 통해 "남한 출신 혁명가를 가족문제로 인도하기 곤란하다면 가족과 함께 인도해 주면 어떤가. 이경우 그 가족도 21명 속에 계산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후에는 "8명의 생존자 중에 5~6명 정도만 인도하기로 하면 회담을 진척시킬 용의가 있다"고도 했다. 북한이 내부적으로 활용할 정치 선전수단 확보에만 매달렸던 셈이다.
당시 정부 당국은 북한이 남한출신의 이른바 '혁명가'들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는 의도에 대해 "월남에 억류돼 있는 우리 인원과 대한민국에 수감돼 있는 북한 측 인원들과의 교환을 인도주의 원칙에 의해 성취하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정치적인 목적만을 달성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신 교수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년간 수감 생활을 하던 중 1988년 광복절 특별가석방을 받아 출소했다. 이후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하며 한편으로는 존경 받는 교수이자 한편으로는 위장전향을 한 친북인사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아왔다.
통일혁명당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아 결성된 조직으로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지하당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신 교수는 1988년 전향서를 쓰고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는데 이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향서는 썼지만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우리 정부는 베트남과 북한 관계에 잡음이 생겨 북한과의 협상 없이도 베트남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외교관 구출이 가능하다고 판단, 1979년 5월 사실상 협상을 결렬시켰다.
한편 '베트남억류공관원 석방교섭회담' 문서철에 따르면 우리 정부가 1969년 KAL 납치사건의 미귀환자 송환 문제를 함께 협상 테이블에 올려놨던 것으로 나타났다.
회담 초기, 북한은 한국 외교관 1인과 북한이 일컫는 '남한에 갇힌 혁명가' 70명을 교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지속적인 교환비율 논의 끝에 한국 외교관 1인과 북한이 요구하는 송환인사 7명을 교환키로 합의가 이뤄졌다.
앞서 교환비율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1대 70'이라는 터무니 없는 교환비율을 제안하자 우리 외교당국은 1969년 KAL납치사건의 미귀환자와 동수로 교환을 하자는 역제의를 했지만 북한은 "여기서 논의할 성질이 아니다"라며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KAL기 납치사건의 미귀환 피해자의 가족 중 한명인 황인철 씨(피해자 황원 씨의 아들)는 유엔을 통해 아버지의 생사확인을 북측에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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