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낭 텐트 가지고 와 아예 자면서 대기…8만원 '줄 서기 아르바이트' 기승
"명품의 희소성과 소비자들의 가치소비 성향으로 오프런 현상 발생"
"명품 구매, 코로나19로 억눌러 온 소비욕구 한꺼번에 분출하는 보복 소비현상"
최악의 황사 예보도 명품 샤넬을 향한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난 14∼15일 중국 내몽골 고원과 고비사막 부근에서 발원한 황사가 16일 한반도에 유입된다는 소식에도, 백화점 문을 열자마자 샤넬 매장으로 달려가는 '오픈런' 사태는 여전했다. 전문가들은 명품의 식지 않은 인기는 명품의 희소성과 소비자들의 가치소비 성향, 그리고 코로나19 시대의 보복 소비현상이 합쳐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최악의 황사가 예보된 16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에는 4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모두 샤넬 번호표를 받기 위한 줄이다. 꽃샘추위의 칼바람 속에서도 이들은 패딩을 챙겨 입고, 커피전문점에서 증정한 간이의자나 캠핑의자를 챙겨와 꿋꿋이 앉아 있었다. 백화점 개점 시간인 10시 30분이 다가올수록 줄은 더욱 길어졌다. 백화점 직원은 10시쯤 나와 매장 방문 번호표를 나눠줬다.
롯데백화점 본점 명품관 앞에도 개점 전부터 샤넬 제품을 사기 위해 50명이 넘게 몰렸다. 샤넬 코코핸들 가방을 구매하러 온 직장인 박모(25)씨는 "황사 농도가 걱정돼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해봤는데 미세먼지가 괜찮다고 해서 나왔다. 사실 오늘 밖에 시간이 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직장인 유모(28)씨는 "800만원 샤넬클래식 가방을 가지고 싶어 연차를 내고 왔다. 황사는 잠깐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 샤넬을 사는 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며 "주말에는 줄이 배로 길어서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어 평일에 나왔다"고 밝혔다. 유씨는 샤넬 매장 입장을 위한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린 후 "취업하고 처음 구매하러 왔는데, 구매에 성공해 엄마와 같이 가방을 매고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유씨는 신세계 백화점 본점으로도 대기 번호표를 받기 위해 이동했다.
황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화점 앞에 줄을 서는 사람들 중에는 일반 소비자들 보다 이른바 업자들이 더 많았다.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샤넬을 파는 리셀러들과 개인사업자로 등록해 판매하는 상인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전날 밤10시부터 대기했다는 개인사업자 이모(45)씨는 "수익의 기쁨이 황사 쯤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며 "일찍 오시는 분들은 아예 전날 주무시기도 하고 새벽 3시, 4시에도 줄을 선다. 침낭 텐트를 가져오는 분들도 있다"고 전했다.
이날 줄 서기 아르바이트를 대거 고용해 명품 싹쓸이에 나선 전문 업자들도 있었다. 이날 백화점 샤넬 매장에서 700만원~3000만원 상당의 물품을 구매할 예정이라는 한 업자는 "한 사람이 한 달에 지갑 3개, 가방 2개, 신발 3개 등 샤넬 제품에 대한 1인당 구매 개수에 제한이 있어 팀으로 나온 사람들이 많다"며 "개인사업자 등록을 하지 않아 세금을 내지 않고 중고 사이트에 명품을 다시 팔아 고수익을 내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고 설명했다.
일부 소비자들과 업자들이 오픈런에 적극 나서는 이유는 '샤테크(샤넬+재테크)' 때문이었다. 박모(29)씨는 "플랫블랙 제품이 너무 유명해 입고가 잘 안 되는데, 재테크를 하려고 나왔다"며 "사흘 정도 아침 7시에 시도했다 구매하지 못해서 오늘은 아침 6시에 나와 봤다"고 말했다. 줄 서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들도 많았다. A(50)씨는 "솔직히 황사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르바이트 수당 8만원을 받으려고 줄 서기를 하고 있다"며 "밤11시부터 새벽 3시 정도까지 비가 왔는데 정말 너무 추웠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명품의 희소성과 소비자들의 가치소비 성향으로 오픈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명품은 희소성이 있고, 모델에 따라 대량 생산을 하지 않아 엄청난 차익을 볼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날씨와 무관하게 오픈런을 위해 줄을 서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 "일부 소비자들의 명품 오픈런은 다른 소비를 절약해서라도 자신이 가치를 두는 물건은 반드시 사겠다는, 비싸더라도 꼭 사고 말겠다는, 가치소비의 한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준영 상명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황사 같은 날씨와 소비자들의 명품 소비는 사실 관계가 없다"며 "명품은 가격이 계속 오르기 때문에 샤테크 등의 수단이 되거나, 코로나19로 평소 야외 활동이 어려워 억눌러 온 소비욕구가 한꺼번에 분출되는 보복 소비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심비(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도)를 추구하는 이른바 '스몰 플렉스(Small Flex, 소소하게 자신의 부를 뽑내거나 과시하는 것)'족이 늘어 명품 선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