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안됩니다" 남덕우의 돌직구가 그립습니다

동성혜 기자

입력 2013.05.22 09:03  수정 2013.05.22 10:32

제자들의 회상 한결같이 "그분은 평정심과 원칙의 화신"

"12시 출국에도 10시 강의 지키고 같은 얘기 묵묵히 경청"

고인이 된 남덕우 전 총리가 지난 1976년 경제기획원 장관시절 박정희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교수님의 최고의 덕은 평정심이었습니다. 화내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고 항상 차분하신 분이셨습니다.”

최장수 재무부 장관, 최장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국무총리, ‘한강의 기적’을 이끈 경제선장, ‘영원한 현역’. 고 남덕우 전 총리의 앞에 들어가는 수많은 화려한 수식어도 마다했다. 고인이 되신 남 전 총리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교수님’이라 부르며 그의 영면을 침통해하면서 벌써 그리워했다.

지난 18일 숙환으로 타계한 고인과 관련해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은 ‘데일리안’과 만남에서 지난 1967년 고 남 전 총리가 서강대 교수였던 당시의 여름을 회상했다.

“엄청 더웠던 여름이었지. 에어컨도 없이 웃통 벗고 공부하고 있을 당시 남 교수님께서 기분이 좋으셔서 교실로 들어오셨어. 그때가 여름방학인데 남 교수님께서 본인이 커피를 한 잔 사시겠다고 하시더라구. 그런 일이 없으셨는데.”

남 전 총리가 당시 커피를 한 잔 사겠다고 하던 것은 ‘수요의 가격탄력도’를 직접 계산했다는 이유에서다. 지금은 좋은 컴퓨터라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계산기를 사용해 일일이 계산을 하던 때라 감히 그 복잡한 ‘수요의 가격탄력도’를 계산할 엄두도 나지 않던 때였다. 그것을 직접 계산한 남 전 총리였다.

김 원장은 “난생 처음으로 남 교수님을 따라 다방에 갔는데 비싼 거 먹으라고 해도 우리는 겨우 칼피스 한잔씩을 마셨지”라면서 “그 정도로 학구적이셨던 분이셨다”고 회상하며 깊은 그리움을 내보였다.

고 남 전 총리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원칙적인 성격은 ‘칼’같은 수업시간 ‘사수’에서도 벗어나지 않았다. 김 원장은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는데”라고 운을 떼며 “10시에 경제원론 강의가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12시 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을 가셔야 했다”고 했다.

당연히 제자들은 꾀를 부렸다. 12시 탑승이라면 10시 강의를 할 수 없다는 계산이 된 것이다. 누가 강의를 하겠느냐는 생각에 타 대학 여학생들과 미팅에 들떠있었다고 한다. 김 원장은 “그래도 이 분이 워낙 휴강을 하지 않으시니까. 몰라서 한 녀석에게 망을 보라고 했지”라며 “어휴. 그런데 강의를 한다는 거야. 오죽하면 강의시간에 질문을 드렸지. 공항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강의를 하시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때 남 전 총리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10시 30분에 떠나면 돼.”

남 전 총리는 말 그대로 딱 30분 강의를 하고 출발하셨다고 한다.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제자들에게도 철저했다. 그만큼 학구열이 강했다는 방증이기도 했고 김 원장은 이를 “평정심”이라고 표현했다. 화내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고 항상 차분한 심성 그대로를 말이다.

고인이 된 남덕우 전 총리가 부총리를 지내던 지난 1978년1월 열린 공화당 단배식에서 박준규 공화정책위원장, 이효상 당의장서리, 백남억 당고문과 건배하고 있다.ⓒ연합뉴스

뚝심과 원칙의 ‘경청리더십’, 이용만 전 장관 “형님같았다” 회상

남 전 총리는 제자들에게도 그랬지만 장관하던 시절 아랫 사람들에게도 온화했다고 한다. 남 전 총리가 재무부 장관을 하던 당시 이재국장(현 금융정책국장)을 담당했던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은 통화에서 “일할 때는 전혀 관료적이지 않았다”며 “성품이 온화해서 마치 스승이고 형님같았고 여간해선 직원들에게 화내는 일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이 전 장관은 고 남 전 총리의 일하는 모습에 대해 “뭐 하나 구상하면 무슨 수를 쓰든지 정책을 추진하고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국무총리고 대통령이고 누가 이야기해도 소신껏 집행했다”며 “대통령이 말씀하셔도 ‘각하 안됩니다’라고 말했던 분”이라고 했다.

남 전 총리의 소신은 널리 알려졌다. 오죽하면 1969년 10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45세의 남덕우 서강대 교수에게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당신도 좀 당해봐”라는 농담까지 섞어가며 재무부 장관 임명장을 줬을까 싶다.

이러한 뚝심과 원칙 속에는 철저한 경청 리더십이 뿌리를 잡았다. 이 전 장관은 “부하 직원이 이야기 하면 설사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해도 다 경청한다”며 “처음 듣는 자세로 경청하는데 한번 이야기한 것을 누가 또 이야기해도 보고에 누락된 것을 본인(남 전 총리)은 참고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지도자의 리더십에 절실한 소통과 경청의 리더십이 있기에 원칙과 뚝심으로 일을 해도 직원들이나 제자들이 기꺼이 따라왔던 것이다.

하지만 남 전 총리에게도 항상 넓은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힘든 고비도 많이 넘겼다. 이 전 장관은 “검정고시를 통과해 국민대학교를 나왔다”며 “그렇게 힘든 고비들을 넘겨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살게 된 주역 중의 주역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고 남 전 총리와 함께 일했을 당시 에피소드 몇가지를 소개했다. 특히 남 전 총리는 서민과 중소기업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 전 장관은 “전에 주택은행이라는 게 있다가 지금은 국민은행이 돼서 없어졌는데 뭐니뭐니해도 서민들은 자기집 마련이 중요하다”며 “(남 전 총리가 재무부 장관이었을)그 당시 땅 있는 사람은 집을 지을 수 있겠끔 주택 금고를 만들었다가 은행으로 승격을 시켰다. 그 당시 3백만원만 융자를 해주면 집을 지을 수 있었는데 그분의 구상 하에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남 전 총리가 주택은행을 만든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중소기업이 담보가 있어야만 금융을 대출받을 수 있는데 중소기업들의 경우 담보가 없어도 사업성이 좋으면 사업을 해야 했다. 이와 관련, 이 전 장관은 “기업이 담보가 없어도 사업성을 보고 돈을 빌려주라고 해서 ‘신용보증기금’이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서민과 중소기업을 위해서는 손발 걷어붙이고 현장에 필요한 정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남 전 총리의 서민에 대한 생각은 그의 삶에서도 그대로 녹아났다. 이 전 장관은 “자기 집 한 채 제대로 없었다”며 “지금 사시는 집도 딸이 마련해 준 것”이라고 소탈한 삶을 소개했다.

남다른 부부금슬에 평생 온몸으로 직접 보여준 서민적 삶

부부의 금슬도 남달랐다. 이 전 장관은 “지난 겨울 그 추울 때 부인이 약간 몸이 불편했었다. 그래서 좀 따듯한 나라로 여행가자고 해도 사모님이 싫다고 하셔서 아무 말 없이 부인 곁에 머물렀다”며 “부부 금슬이 참 좋았다”고 회상했다.

김윤형 외국어대 명예교수도 ‘데일리안’과 만남에서 남 전 총리가 부인과 만난 인연을 소개했다. 남 전 총리 4학년 때 부인이 1학년으로 같은 대학교를 다녔는데 부인의 영어 가정교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남 전 총리가 연애편지를 얼마나 잘 쓰는지 그에 부인이 반하셨다고.

김 명예교수는 “6.25때 서로 떨어져있었는데도 연애편지를 주고 받으며 결국 결혼까지 했는데 두 분의 금슬이 너무 좋았다”며 “영어공부를 하러 사모님이 다니셨는데 나이들어 공부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그래서 (남 전 총리가) ‘영어공부 어떤가’하고 위로하더라. 이에 사모님이 ‘잘 안된다’고 하니 그걸 들은 우리가 농담을 해도 두 분 다 화도 안내시고 서로 웃으며 바라보더라. 내가 1970년에 결혼할 때 주례를 부탁했고 내가 2남 1녀인데 (남 전 총리가) 대를 이어 주례를 해주셨다”고 고마워했다.

이어 김 명예교수는 “(남 전 총리는) ‘나이가 어린 사람이든 동료든 윗사람이든 이야기를 할 때 목소리를 높이지 말고 화를 내지 말고 그 대신 할 이야기는 다하라’고 자주 말씀했다”고 깊은 그리움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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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혜 기자 (jungtun@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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