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 44>아테네 제국의 국제도시 델로스의 영광과 몰락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델로스의 영욕의 역사
델로스. 늘 가보고 싶던 곳이다. 그리스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신 가운데 하나인 아폴론이 주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폴론과 그의 누이 아르테미스의 탄생지인 델로스는 그리스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긴 섬이다. 바로 델포이와 함께 아폴론 신앙의 성지였던 것이다. 델로스는 이런 신성성에 덧붙여 에게 해의 중심지에 위치한 지정학적 장점 덕분에 국제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는 바위투성이 섬이 기원전 5세기부터 육백여년 동안 어떻게 세계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국제도시가 될 수 있었을까? 델로스 섬이 얼마나 황량한 곳이었는지는 '오딧세이아' 제6장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는 오딧세우스는 갖은 고초를 겪다가 파이아케스족의 나라 스케리아 섬에 표류한다.
여기서 오딧세우스는 처음으로 진심어린 환대를 받게 된다. 결정적인 계기는 알키노오스의 딸 나우시카와의 만남이다. 시녀들과 빨래를 나왔던 나우시카 공주에게 다가가 오딧세우스는 감미로운 말로 그녀를 녹여 낯선 이방인을 왕성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내 그대에게 간절히 애원합니다. 여왕이여! 그대는 여신이오,
여인이오? 그대가 넓은 하늘에 사시는 여신들 가운데 한 분이라면
나는 그대를 생김새와 키와 몸매에 있어 누구보다도
위대한 제우스의 딸 아르테미스에 견주고 싶군요.……
나는 전에 델로스에 있는 아폴론의 제단 옆에서
대추야자나무의 어린 가지가 돋아나는 것을 본 적이 있지요.
나는 그곳에도 간 적이 있으니까요. 내가 나중에 쓰라린 고난을
겪게 되어 있던 그 여행길에는 많은 백성들이 나를 따랐지요.
그것을 보고 나는 한참동안 마음속으로 놀랐지요. 그곳에서는
일찍이 그런 어린 가지가 대지에서 돋아난 적이 없기 때문이오.
꼭 그처럼 여인이여! 나는 지금 그대를 보고 놀라고 감탄할 따름이오.
그래서 나는 그대의 무릎을 잡기가 심히 두렵고 내게는 쓰리란 슬픔이
닥쳤소. 어제, 스무 날 만에 나는 포도줏빛 바다에서 벗어났어요.“
나우시카 공주가 여신 아르테미스를 닮았다는 오딧세우스의 아부성 말재간이 대단하다. 하지만 어떤 나무도 자랄 수 없던 델로스의 대지에 돋아난 대추 야자나무의 어린 가지 같은 여인이라는 표현이야말로 최상의 칭송이 아니었을까? 이와 견줄 만한 극찬이 또 어디 있겠는가. 거칠기로 이름난 델로스의 자연 환경을 잘 알고 있었을 그녀가 오딧세우스의 감미로운 이 말에 감동받지 않았을까.
이렇듯 사람이 살기 어려울 만큼 황량한 델로스에 사람들이 하나 둘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이곳이 더 할 수 없이 신성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섬에 가장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사람들은 아테네인들이었다. 아테네가 이곳에 살던 선주민들을 통제하며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참주 페이스트라토스(재위 기원전 600~ 527)가 지배할 때였다.
그는 델로스에 아폴론에게 봉헌하는 신전을 건립하고 그가 세 번째 집권한 기원전 540~528경에 섬 전체를 정화(淨化)했다. 아폴론 신전이 보이는 곳에 있는 모든 무덤을 다른 곳으로 이장토록 한 것이었다. 이는 아테네의 델로스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아폴론 신전의 신성성을 그리스인들에게 각인시킨 행위였다.
아테네는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에게 델로스를 넘겨주게 된다.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도시국가들 사이에 맺었던 델로스 인보동맹은 와해되었다. 그러나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자 곧바로 델로스의 지배권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478년에 아테네 동맹(Atenian League)을 맺고 그 본부를 델로스에 두게 된다. 델로스 동맹이라 불리게 된 이유다.
델로스의 번영은 아테네의 번영과 함께 시작되었다.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몰리는 법이다. 동맹의 금고가 설치되면서 델로스는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이 쌓여있는 부유한 섬으로 떠오른 것이다. 델로스 동맹의 본부는 당시 그리스 세계의 국제연합 본부와도 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동맹의 크고 작은 안건을 심의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자주 열렸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국제도시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리클레스가 집권한 아테네가 제국주의로 흐르게 되면서 안전을 확보한다는 명분을 들어 기원전 456년에 동맹의 금고를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 옮겨간다. 이는 델로스의 약화를 초래했을 것이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델로스에 전염병이 돌자 아테네는 이를 계기로 델로스 섬을 두 번째로 정화하게 된다. 그 때가 기원전 426년 말부터 425년 초 겨울 시기였다. 이 때 델로스에서는 사람이 태어나서도 또 죽어서도 안 되는 신성한 땅으로 재규정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무덤은 인근의 레네이아 섬의 ‘정화 단지’로 명명된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섬의 정화이후 델로스는 새로운 번영의 시대를 맞았다. 새로운 신전이 건립되고 축제도 5년마다 다시 열렸다. 물론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인 기원전 403년에 아테네는 델로스를 스파르타에 넘겨줘야 했지만, 기원전 394년에 그 지배권을 되찾았다. 이후 기원전 345년에 델로스인들이 아테네의 지배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델포이의 신전에 신탁을 청원하기도 했지만 기원전 4세기 내내 아테네의 통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4세기 말에 델로스의 지배권은 아테네에서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에게로 넘어갔다. 그의 아들 데모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는 델로스 섬에에게 해의 도서 연맹의 본부를 두고 또 종교의 중심지로 삼았다. 델로스는 기원전 314년부터 166년까지 처음으로 자유로운 국가가 되었다. 델로스는 이 헬레니즘 시대를 맞아 새로운 번영을 이루었다. 물론 명목상 자유국가였지 완전한 독립국가는 아니었다. 아테네 동맹을 승계한 히에로피오이(Hieropioi)라는 지방 감독관이 신전과 그에 속한 재정을 관리했다. 또 여젼히 알렉산더를 계승한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델로스 섬을 둘러싸고 강력한 국가들이 지배권을 다투면서 다양한 지배자들이 거쳐 갔다. 이런 가운데 아폴론에 봉헌하는 다양한 기념물들이 건립되고 봉헌물들이 델로스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를 통해 델로스는 종교의 중심지에서 점차 상업적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더해진다. 상업 활동의 가장 큰 특징은 공공 은행과 민간 은행들이 많이 개설되었다는 점이다. 델로스가 국제 금융 중심지로 성장한 것이다. 작은 섬인 델로스가 이미 기원전 6세기에 자체적으로 은화를 제작했고, 후에 청동 주화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상거래와 금융거래가 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델로스는 기원전 2세기 말에서 1세기 초에도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델로스는 명실상부한 국제도시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물론 이탈리아인, 소아시아인, 포이니케인, 시리아인, 이집트인, 팔레스타인, 유태인들이 몰려들었다. 이후 로마와 적대적이던 미트리다테스와 그의 동맹국에 의해 기원전 88년에 침략을 받아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리스 역사가 파우사니아스에 의하면 당시 델로스의 주민 2만명 정도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최전성기 인구가 2만 5000명에 이르렀던 것에 비추어보면 거의 전 주민이 몰살당한 셈이었다.
얼마 후에 로마의 장군 술라에 승리에 의해 섬이 수복되었지만 델로스의 쇠락을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기원전 58년에 로마 원로원에 의한 델로스 섬의 신성성이 재확인되고 아테네인들에게 델로스 섬의 관리를 맡겼지만,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델로스에 대해 아테네인들은 관심을 잃기 시작했다. 오히려 2세기에 그리스 문화 애호가였던 하드리안 황제가 델로스 섬의 제례를 되살리고 성역을 보호하기 위한 성벽을 쌓는 노력을 한 적도 있지만 끝내 델로스의 부흥을 일구어내진 못했다.
이후 델로스 섬은 로마 시대 말기에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교회를 짓기도 하고, 중세시기엔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지만 점점 황폐해져 무인도가 되고 말았다. 신화가 살아있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 믿음이 존재하는 한 황량한 섬도 번영한 도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공통의 신을 잃고 경외감마저 잃어버리는 순간 아무도 살 수 없는 무인도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에 의지해 세워진 도시는 그리스 도시국가 사이의 내전과 로마와 이방국가들의 전쟁 통에 신들이 거처하는 성역이 파괴되면서 문명의 파괴와 정신의 퇴조를 함께 초래했다.
신화의 섬, 신들의 나라 델로스
델로스는 신들의 섬답게 신전들이 많았다. 이 섬의 주인을 모시던 아폴론 신전은 물론, 헤라를 모신 신전.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를 모신 신전도 있었다. 특히 이집트의 신인 이시스 신과 시리아의 신을 모신 신전도 있었다. 국제도시의 포용성을 잘 보여준다. 헤라 신전, 이시스 신전, 시리아인 신전은 선착장에서 내려 킨토스 산으로 오르는 오른쪽 길로 로마 극장을 지나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각 신전들의 기둥과 골격은 거의 모두 사라졌다. 일부 복원된 기둥 몇 개 정도가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화려했던 신전과 주택들의 대리석은 2천년 동안 숱하게 파괴되고, 건축 자재로 끊임없이 반출되었기 때문이다. 폐허의 도시는 손쉬운 채석장이 되었던 것이다.
번영의 국제도시, 거부들의 화려했던 저택들
델로스는 신의 섬이지만 역시 인간들이 부대끼며 살아간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번영하는 국제도시였던 만큼 거부들의 화려한 저택들도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현재 일부가 복원되어 공개된 저택들은 대개 로마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ㅁ'자 형의 주거 구조에 가운데에 바닥을 모자이크로 장식한 중정(中庭)을 갖고 있다. 유명한 저택으로는 헤르메스의 집, 디오뉘소스의 집, 클레오파트라의 집, 삼지창의 집 등이 있다. 집 주인의 이름을 땄거나 특정 모자이크의 무늬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집의 규모나 화려한 면에서 볼 때 이들은 델로스의 시민 중에서 거부에 속했을 것 같다. 선착장에서 내려 오른쪽 길로 킨토스 산으로 오르다보면 초입에서 오른쪽에 클레오파트라의 집, 맞은 편에 디오뉘소스의 집,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 왼쪽에 삼지창의 집을 볼 수 있다. 로마 극장 바로 못미처 있다. 헤르메스의 집은 로마 극장의 뒤편 북쪽으로 홀로 떨어져 있다.
국제 무역의 중심지 델로스 시가지
선착장에서 내려 곧장 앞으로 나아가면 과거 델로스 중심 시가지로 들어간다. 맨 처음 콤피탈리아스트의 아고라(Agora of the Competaliasts)를 만나고 이어서 왼쪽으로 꺾어 신성한 길(Sacred Way)로 접어든다. 길 좌우에 마케도니아 필립 5세의 회랑이 길게 이어진다. 오른쪽 회랑의 뒤편에는 델로스의 아고라가 있었다.
앞서 델로스의 과거 역사를 살펴보았듯이 델로스는 아테네가 도시를 키웠고, 마케도니아가 크게 번영시켰으며, 로마가 그 뒤를 이어받아 통치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델로스 성역의 큰 규모의 건축물들은 대개 헬레니즘 시대의 것들이거나 로마시대의 것들이다. 마케도니아 필립 5세의 회랑이 델로스를 들어서자마자 압도하는 위세로 신성한 길을 열고 있고,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이 탄생한 신성한 호수 옆에 조성된 이탈리아인의 아고라는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도시 시가지 배치 구조를 보면 이 섬 신화의 주인공인 레토의 신전, 아폴론, 아르테미스의 신전은 현저하지 않다. 그저 작은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큰 보물 창고가 다섯 개나 있었고, 한 도시에 아고라가 세 개나 있었다. 이는 이 섬이 신화의 섬에서 점차 상업적 도시, 국제적 금융도시로 변모해 나갔음을 짐작하게 한다.
델로스 섬이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가장 큰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게 된 나라는 아마 낙소스였을 것이다. 낙소스는 에게 해 여러 섬나라 중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였다. 낙소스 역시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지역과 중개 무역을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국제 상업도시로 성장한 델로스와 무역거래가 활발했을 것 같다.
그들이 아테네 다음으로 델로스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각종 봉헌물을 보내고 델로스에 자국민을 위한 건축물을 세운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낙소스의 건축물은 원활한 무역 거래 및 자국민들의 편안한 왕래를 위한 숙소 및 영빈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낙소스인들은 이 섬의 신성성을 살리는 봉헌물로 이 섬이 신들의 땅임을 확인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기원전 7세기 말에 낙소스인들은 레토 여신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은 신성한 호수를 수호하는 의미에서 호수를 외호하는 거대한 대형 사자 석상을 무려 16개나 조성했던 것이다. 현재 다섯 마리가 유적지에 남아있고, 네 마리는 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이 사자상은 현재 델로스 섬의 상징처럼 두드러지는 유물이다. 델로스의 번성 시기에 열여섯 마리의 정렬된 사자상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곳을 참배하는 방문객들이 반드시 들러보며 레토의 신성한 출산의 의미를 되새겼을 것이다.
델로스 섬 유적지는 완전히 발굴되지 않았다. 북쪽 언덕 쪽은 아직도 미발굴된 지역으로 여기 저기 유허가 널려 있다. 포세이도니아스트 공동시설의 주변과 그 위쪽으로 많은 유허가 흩어져 있다. 포세이도니아스트 공동시설만 해도 대규모 복합시설물의 일부로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던 시설인지는 불분명하다.
눈에 띄는 특이한 유물이 하나 있다. 두 개의 남근석상이다. 남근 숭배는 다산과 번영을 기원한 데서 유래한다. 동양은 물론 그리스와 로마에도 널리 퍼져 있던 풍습이다. 델로스가 상업도시로 발전하면서 무역거래를 하는 상인들이 많이 왕래했을 것이다. 이들의 바람을 충족하기 위해 세워졌던 건 아닐까. 델로스는 국제적 노예시장이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노예상인들이 사업의 번창을 기원했을 것이다.
오랫 동안 그리스 세계의 경외의 대상이었던 신성한 섬 델로스의 웅장한 신전들, 그리고 화려했던 도시의 다양한 건축물들은 일부의 흔적만 남기고 거의 다 사라졌다. 델로스의 독특한 신성성은 분명히 이 섬의 번영을 일구는 핵심요소가 되었었다. 하지만 경외감과 신성성이 사라지는 순간 델로스는 몰락하고 사람들로부터 오랜 세월 쉽게 잊어져야 했다. 델로스는 이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탄생지를 찾는 답사자로 붐비는 곳이 되었다. 당대인들을 가슴 뛰게 하던 성지 델로스의 영화의 흔적을 좇는 일이 마냥 허무한 것은 아니다.
신화를 잃어버린 시대에 새로운 신화와 신성성을 우리 마음에 부활시키는 작은 불꽃을 찾고 싶다. 그래서 힘들지만 킨토스 산정에 오르고 퇴색된 석축과 기둥, 그리고 닳고 단 대리석 바닥 돌 위를 터벅터벅 걷는다. 델로스 선착장 가까이에 있는 고대 국제항 델로스 포구는 많은 모래가 퇴적되어 얕은 여울이 되었다. 성스럽고 화려했던 영광의 시절은 그렇게 묻혔다. 그래도 신화가 묻힌 땅은 언제나 꿈을 찾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영감이자 희망이 되지 않을까.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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