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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입은 북한 접대원이 심장에 남는 사람을 부르더니...


입력 2015.09.27 09:58 수정 2015.09.27 10:04        데스크 (desk@dailian.co.kr)

<추석 특집 단편소설-가족①>반동분자 몰려 탈북 '형호'

"고문에 지친 보위원들 방심 틈 타 대동강에 뛰어들어..."

1

세관 검사장을 빠져 나온다. 출영객들이 검사장 출구 양 옆에 늘어서 있다. 대부분 한국에서 일하다 돌아오는 가족을 마중 나온 사람들이거나 자신이 안내할 관광객을 찾는 사람들이다. 추석을 며칠 앞둬선지 평소보다 훨씬 복잡하다. 여행사 이름을 적어 머리 위로 치켜든 피켓들 사이로 이마가 벗겨진 연변대학 민 교수 얼굴이 보인다. 그가 손을 흔들고 있다. 성재는 형호와 자신의 여행가방을 함께 실은 카트를 밀며 사람들을 헤치고 민 교수 곁으로 다가간다.

“또 그 일로 왔어요?”

악수를 나누며 민 교수가 묻는다. 얼굴을 활짝 펴서 반가움이 넘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물음에 근심이 드러나 있다. 성재는 탈북자를 취재한다고 이곳에 드나들며 그를 곤욕스럽게 하던 옛일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미 신문사를 퇴사했고, 출발 전 서울에서 형으로 모시는 분과 함께 간다고 전화로 알렸다. 전과 다른 여행이라고 짐작했음직한데, 확인을 해서 근심을 잠재워 두려는 모양이다. 연변은 국경지역이라 정보기관의 눈초리가 매섭다. 성재가 연변에 오면 정보기관 요원들이 민 교수를 찾아와 성재의 행적을 캐고,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던가 보다. 그 사실을 성재에게 짤막하게 귀띔하는 것조차 국가비밀을 폭로하는 것처럼 민 교수는 두려운 낯빛을 보였다. 게다가 연변에는 북한을 두둔하는 분위기가 저녁 안개처럼 엷게 퍼져 있다. 주민 대부분이 함경도 이주민의 3, 4세다. 민 교수도 무산에 멀지 않은 친척이 산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북한과 관련한 일을 두고 한국 사람에게 협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성재는 자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 자세히 모른다. 두 주 전쯤 북한인권문제를 토의하는 세미나가 끝난 뒤 형호는 바람이나 쇠러 연변에 다녀오자고 했다. 한가하게 여행을 할 그가 아니었다.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고 묻듯 성재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아우가 그쪽을 잘 알잖아, 라고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그는 늘 그런 식으로 설명을 생략한다. 절실히 원하는 심정을 안 가려면 말고, 라고 말하는 듯한 자학적인 표정 뒤에 숨겼다. 건강이 허락할 때 고향 땅이나 한번 바라보자는 것일까? 추석을 맞아 모처럼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다니까 가족 생각이 더 간절할까? 하지만 성재는 따져 묻지 않았다. 어차피 갈 것이라면 여정을 통해서 차차 깨닫는 게 낫겠다고 여겼다. 그가 입 밖으로 가자는 까닭을 드러내면 가지 말자고 고집을 부렸을 가능성이 컸고, 그는 성재의 처사를 박절하게 여기며 혼자라도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최근 그는 열정, 의지, 용기 같은 걸 다 내팽개친 사람처럼 변했다. 그를 과거로 돌이키는 건 어렵다 치더라도 더는 나빠지지 않게 하는 역할이 누구에겐가 주어졌다면 바로 자신이라고 성재는 믿는다.

하지만 성재는 마음이 개운하진 않았다. 신문사를 나온 뒤 드디어 백수가 됐다는 자각이 들어 팔리지도 않는 책 한 권을 내고서 작가 행세를 하며 사는 주제다. 형호가 대는 여행경비를 받아 쓰자니 자존심이 상했고, 가계를 축내자니 부담이 컸다. 최근에는 아들과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난 다툼을 겪었다. 사소한 다툼이 커져 면전에서 아들한테 쌍욕을 들었다. 그 환장할 일 때문에 자신의 부재가 아내에게 비굴한 도피로 비치고, 그래서 더욱 가족과 골이 깊어질까 우려됐다. 무언가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발을 떼어 놓을 수 있는 여행을 이처럼 어정쩡한 기분으로 나선 된 것이다.

성재는 민 교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루고 공항청사 밖으로 나가는 출입구 쪽을 향해 턱짓을 한다. 우선 혼잡을 피해 청사 밖으로 나가고 싶다.

청사 처마 밑에 서자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너르고 한적한 광장이 바라보인다. 먼저 나온 사람들이 물이 고인 것처럼 하얀 빛을 튀기는 광장을 두셋씩 짝을 지어 걸어가고 있다. 주변의 포플라나무에서 작은 새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온다. 성재는 참았던 담배를 빼물고 뻣뻣한 목을 풀기 위해 서너 번 고개를 좌우로 내두른다. 눈과 볼이 푹 꺼진 형호를 민 교수가 곁눈질하는 게 보인다. 성재가 형호를 소개한다. 형호는 몰라도 되는 사람을 대하듯 민 교수와 건성으로 통성명을 한다.

“놀러 왔어.”

성재는 입에서 쉽게 튀어나오는 말로 민 교수에게 뒤늦은 대답을 한다. 그렇다고 성재가 탈북자를 찾아 다닐 때처럼 민 교수가 곤란을 겪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형호 또한 탈북자니까. 다만 이미 한국에 들어와 사는 게 다를 뿐이다. 민 교수가 믿기 어렵다는 쪽에 가깝도록 이물스럽게 웃는다. 세 사람은 민 교수의 승용차가 있는 광장 너머 주차장으로 향한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돼요?”

성재가 형호에게 묻는다. 하찮은 질문조차 너무 참아왔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고향 떠나올 때 지나온 뒤로 처음……. 7년쯤 됐어.”

앞서 가던 민 교수가 형호 형을 힐끗 돌아본다. 놀러 왔다는 대답에 가졌을 기대가 그의 표정 속에서 재빨리 달아난다. 탈북자 취재를 하던 시절 성재는 민 교수의 신세를 많이 졌다. 그의 머릿속을 뒤져 정보를 얻고, 길안내를 받고, 운전을 시키고, 술친구를 삼았다. 물론 서울에 오면 비슷한 역할을 성재가 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서로 주고 받는 걸 웬만해서는 따지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는 걸 느꼈다. 성재는 다섯 살 아래인 그를 아우 삼았고, 그는 성재를 기꺼이 형이라고 불렀다. 성재와 형호가 그렇게 지내는 것처럼. 그래도 그는 연변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잊지 않고 있다. 지금은 정보기관 요원의 찌푸린 눈살까지 다시 한 번 떠올릴 것이다.

여행가방을 트렁크에 싣고 민 교수의 차는 공항을 벗어난다. 잔물결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반짝거리는 부루하통하가 나타난다. 저 강에 물이 넘실댄 건 수중보를 설치한 뒤부터다. 한강을 본떴다나.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성재의 눈에는 탈북한 핵물리학자를 찾아 갈대와 건설 폐자재와 연탄재와 모기 따위로 어지러운 강바닥을 헤매던 때의 풍경이 선하다. 그 때문인지 모르는 도시에 온 것처럼 낯설다. 형호 역시 창 밖 풍경에 눈을 팔고 있다. 어떤 풍경에는 그게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둬오지 못한다. 고향을 떠나올 때의 쓰린 추억 속을 헤매는 것일까?

2

민 교수 집 근처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방학 중인 민 교수가 집에서 오가기 편리한 점을 고려해 예약해 둔 호텔이다. 여장을 풀고 나니 붉은 저녁놀이 빌딩 사이로 스며든다. 해가 건너편 빌딩 허리께로 이동한 탓에 건물들과 가로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성재는 점심을 기내식으로 때워 배가 고프다. 민 교수가 류경식당으로 가자고 제의한다. 골목에서 대로의 번듯한 빌딩으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 아주 오래된 북한식당이다. 성재가 자주 들르던 곳이다. 자신이 대접할 것이니까 가급적 북한 걸 팔아 주자는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형호가 꺼리면 어쩌나 해서 눈치를 살핀다. 그는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북한말로 떼불알이라고 한다는, 실제로는 남한사람들이 지어낸 말이지만, 샹들리에 아래 네
모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백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는 중인데, 홀 정면에 있는 무대에서 접대원들의 공연이 시작된다. 세월이 흘렀어도 바뀌지 않은 레퍼토리의 반복이라서 성재는 공연에 호기심을 갖지 않는다. 식탁에 차려진 불고기와 잡채, 언감자떡 따위에 눈을 박고 먼저 시장기를 달랜다. 뜻밖에 형호는 다르다. 좋아하는 냉면이 나왔는데, 아예 젓가락을 놓다시피 하고 구경을 한다. 그는 위를 거의 다 잘라냈다. 암 환자다. 그런데도 암이 주변 장기로 전이돼서 몸이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이유만으로 냉면을 입에 넣지 못하는 건 아닌 듯하다.

“쟤들도 명절 앞이니 고향 생각을 하겠지?”

한참 뒤 형호가 가만이 입을 연다. 연변에 오니까 몸 상태가 더 좋지 않은지 근심이 들 정도로 말이 없다가 스스로 처음 한 말이다. 성재는 불고기를 집던 젓가락질을 멈추고 특별한 게 뭐가 있는지 무대로 눈길을 돌린다. 머리를 하얀 띠로 질끈 동여매고 남색 조끼와 흰 바지를 입은 남장 접대원이 군밤타령 곡조에 맞춰 춤을 추는 중이다. 음악소리만 듣고도 뭘 하는지 이미 예상했다. 혹시 해서 주위를 둘러본다. 홀 가득 앉은 남한 관광객들이 대부분인 손님들, 그들의 무대를 향한 시선이나 소란스러운 잡담, 직업적인 것치고는 퍽 자연스러운 접대원들의 미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서 성재는 특별한 걸 찾지 못한다. 형호가 유별난 감상에 젖는 걸 이해하면서도 그런 나약함이 그의 삶에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늘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생각을 떠올린다.

“고향 생각은 무슨……. 외화벌이 일꾼으로 성심을 다해 일하니 보람차다, 아니면 낮에 쇼핑센터에서 봐 둔 옷이 잘 어울릴까, 애인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런 걸 따지고 있겠지.”

성재는 불고기를 우걱우걱 씹으며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고향에 저만한 자식들이 있나요?”

백주를 마시던 민 교수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끼어든다. 하필 이따위 질문이람.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성재와 형호 사이에서 금기시돼온 것이다. 형호의 가슴 속에 자리한 슬픔을 만지작거리다가 키울 게 뻔하다고 성재는 여겨왔다. 그와 해결책이 없는 고민을 나누는 불편을 감당해야 하는 것 또한 마땅찮았다. 형호 역시 성재의 이런 태도를 양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따져봐도 성재의 태도가 야박하지만 그르다고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민 교수가 미련한 놈이 일 저지르듯 금기를 깬 것이다. 성재가 민 교수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중인데, 형호가 민 교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더니 눈길을 허공으로 돌린다. 한참 그런 자세로 있다. 성재와 민 교수는 음식을 다시 입에 넣기 시작한다. 민 교수는 괜한 걸 물었다는 듯 눈빛에 비낀 민망한 표정을 눈을 깜박거려 지우려 애쓰고, 성재는 음식을 씹으며 형호를 감상에서 꺼내올 궁리를 한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형호는 체코 프라하에서 봉제공 150명을 데리고 일하던 외화벌이 일꾼이었다. 그의 후원자였던 평양의 높은 간부가 알 수 없는 일로 처형된 뒤 대사관에 있는 보위원으로부터 트집이 시작됐다고 했다. 조국에 제시한 목표벌이 미달, 여종업원들에 대한 착취, 잦은 생활총화 불참, 뇌물 상납, 부화(불륜)사건 따위의 비리가 하나하나 들춰졌다. 누구나 그렇게 해왔던 일들이었고, 누구나 큰 허물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일들이었다. 평양에도 있는 빨간 무궤도열차 트램을 타고 대사관을 드나들며 그는 보위원의 추궁을 순순히 시인했다. 부지배인 김 씨와 사랑을 나눴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았다. 김 씨는 대질을 할 때 내가 어디 남자가 없어 네까짓 반동하고 사랑을 했겠느냐고 그의 따귀를 후려갈기는 연기를 능청스럽게 했다. 그는 잘못을 깨달은 자신이 앞으로 당과 조국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게 될지 두고 보라고 보위원에게 역설했다. 보위원은 피식 웃었다.

“나라의 발전이란 그런 관행을 잘라내는 일이며, 설령 그 과정에서 개인들의 사소한 희생이 따른다 해도 그 원혼 위에 대의라는 이정표를 세워야 하는 거요.”

보위원 역시 그로부터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얼굴을 싹 바꾸고 자신의 역할이 이런 것임을 몰랐느냐고 묻듯 말했다. 생경했지만, 봐주기 위해서는 먼저 겁을 준다는 그들의 직업적 습속을 형호는 가슴에 새겼다.

땀이 온몸을 적시던 여름 날 오후 보위원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우리가 적발하고 동무가 시인한 범죄사실에 의해 동무는 혁명대열을 이탈한 반혁명분자가 되었소. 당의 은정을 기다리기오.”

뜻밖의 통첩이었다. 멍한 정신을 가다듬고 반혁명분자와 은정이라는 상반된 결론에 숨은 뜻을 찾기에 고심할 때, 대사관의 친구가 찾아왔다. 평양에서 소환장이 내려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친구는 같이 있으면 전염되는 것이라도 있는 듯 음료 한 잔 나누지 않고 돌아섰다. 두고 보라. 어머니 당은 내게 꼭 재기의 기회를 줄 거야. 예상한 것보다 아주 나쁜 조사 결과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보위원을 잘 설득시켰다고 형호는 믿었다. 처형된 높은 간부가 한 다리 건너야 선이 닿은 사람인 게 다행스러웠다.

비가 내리는 조국의 공항에서 그를 맞은 건 또 다른 보위원들이었다. 그는 보위부 조사실에 갇혔다. 연일 내리는 장대비를 철창문을 통해 바라보았다.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간절히 갈구했다. 기대와 달리 높은 간부의 비자금책으로 둔갑하는 신세를 속수무책으로 감당해야 했다. 보위부 조사실과 같은 형제산구역이라서 걸어서 반 시간이면 닿는 거리에 사는 아내와 아들과의 재회 또한 머나먼 이국에 사는 것처럼 기대를 품는 것조차 가당찮은 일이었다. 생명이 대수롭지 않게 육신을 떠날 수 있겠구나 차츰 깨달으며 진저리를 쳤다. 마침내 보위원들에게 함부로 목숨을 맡길 수 없다고 각오했다.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이 났는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평양에 남았던 아내가 가슴 속에 들어와 발목을 잡았다. 당신이 떠나면 이젠 다신 못 만나. 그걸 알지? 하지만 그 동안의 경험들이 순응으로 얻을 이익에 대한 기대를 망상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고문에 지친 보위원들이 그를 가엽게 여긴 누군가의 배려라며 대동강변의 허름한 식당에서 마지막 한 끼의 외식 기회를 베풀었다. 그들이 나른한 식곤증에 젖어 방심하는 틈에 그는 비가 쏟아지는 강물에 뛰어들었다. 조국을 버리는 기구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형, 한 잔 해.”

성재는 의연하게 술잔을 들어 형호 앞에 놓인 잔에 부딪힌다. 형호가 병원에서 나온 다음부터 성재는 그의 잔에 생수를 채웠다. 그의 마음이 허전할까 봐. 술자리 분위기가 전과 달라져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 넣을까 봐. 그도 이 어줍잖은 짓을 습관으로 받아들였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생각이 마음대로 되지 않은 채 성재의 머릿속에 돌연 많은 의문들이 돋아난다. 가족이란? 혈육이란? 정이란? 성재는 술잔을 입에 대면서 형호가 아들과 아내, 고향에 대해 실컷 취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좋겠다고 마음을 바꿔먹으려다가 단호히 고개를 내젓는다.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 형호를 뒷바라지할 것인가.

서울에 정착한 뒤 형호는 평양의 가족과 연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불행하게도 그가 고용한 브로커의 선은 가족에까지 닿지 않았다. 늙은 부모까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추방당했다거나 아들은 군대에 갔다거나 따위의 풍문만 물어왔다. 탈출한 그의 처지를 감안하거나 아들의 나이에 걸맞도록 추측된 말이라고 그는 믿었다. 탈북한 사람들이 남한사회에서 북한인권운동이니 용공분자 규탄이니 하여 앞장설 때 그는 고슴도치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북한인권문제를 연구하는 기관의 간부가 그러면 되느냐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으면서. 체코에 갈 때 인질로 남겨진 가족이 아직도 인질 역할을 하고 있음을 절감했다.

최근에는 교회에도 가고, 절에도 가고, 무당한테도 갔다. 무당은 도모하는 일을 혼자서 해내기는 벅차지만, 도움이 따르면 수월하게 이루리라, 라는 하나마나 하는 말을 정색하고 시부렁댔다. 간절한 소망이 기댈 곳이 이런 허황한 구석밖에 없다는 것에 그는 화를 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다 행복에 겨운 사람들의 편이나 든다고 몹시 불만스러워했다. 성직자들이 달래는 말을 듣고 절인지 교회지 계속 다니는 듯했지만, 암이 전이됐다는 판정을 받고 나서는 그것마저 그만두었다. 마침내 철저히 망가지는 길로 들어선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했다.

형호가 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는다. 공연은 다음 순서로 이어진다. 한복을 입은 접대원이 전자기타를 튕기며 ‘심장에 남는 사람’을 부른다. 그는 다시 무대로 눈길을 옮긴다. 고향의 하찮은 것들에도 저절로 눈길을 빼앗기듯.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이 얼마나 많느냐고 하잖아.”

성재는 마음먹은 것보다 더욱 강하게 노래 가사에 빗댄 말을 형호에게 내뱉는다. 접대원은 헤어진대도오, 헤어진대도오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에, 라고 노래를 부른다. 가족에게 어서 취하라고 노래가 소나기 퍼붓듯 그를 자극하는 것 같다. 접대원은 애타게 몸을 비틀며 아, 그러언 사라암, 나아는 못 잊어, 라는 구절로 노래를 마무리한다. 홀 가득 박수소리가 다시 쏟아진다. 수없이 보았을 공연일 것인데, 민 교수는 박수뿐 아니라 퇴장하는 접대원을 향해서 손까지 흔든다. 형호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고 손바닥을 두어 번 부딪히고는 노래의 여운 속에 잠기듯 잠자코 있다.

갑자기 식탁에 적막이 감돈다. 웬일인지 성재는 입이 열리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생각에만 머무른다. 아들에게 욕설을 듣던 장면이 머릿속에 언뜻언뜻 끼어들어 훼방을 놓고 있다. 이따금 환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 성급히 술잔을 들이키는 형호의 동작만이 식탁의 적막을 깨뜨린다. 그러고 보니 그도 백주를 자작하고 있다.

“이럼 안 돼.”

성재가 잔을 가로막자 형호가 손을 뻗어 가로채간다. 민 교수가 저도 가라앉은 분위기를 잡아 보려는지 연길 마사지 집 이야기를 꺼낸다. 전신마사지는 어떻고, 오일마사지는 어떻고, 마사지사 아가씨는 어떻고……. 성재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그 이야기를 오랫동안 지껄인다. 그 사이 성재는 이따금씩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고 술을 마시는 형호를 째려본다.

3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운 형호가 코를 곤다. 그가 잠들기를 기다리던 성재는 창가 소파에 앉는다. 도시의 야경이 부루하통하를 울긋불긋 홀로그램처럼 수놓고 있다. 수면 아래에 또 하나의 황홀한 도시가 자리한 것처럼. 성재는 휴대폰을 꺼내 카톡 앱을 연다. 딸 정희 이름을 찾아 검지로 자판을 누른다.

‘나, 연변에 왔다. 잘 있지?’

아침에 얼굴을 보았으면서 새삼 잘 있느냐고 묻는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직 실험실에 있니? 저녁은 먹었고? 학위를 받았어도 고생이 끝이 없구나. 이런 다감한 문장으로 바꿀까 망설인다. 머쓱해져 그만둔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려고? 성재는 자신에게 묻는다. 이미 써 넣은 문장의 전송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뭔가 부족한 듯해 휴대폰으로 부루하통하의 야경을 찍는다. 그걸 또 카톡으로 보낸다. 정희는 이제 곧 집을 떠난다. 결혼을 한다.

‘연변에 가신 줄 몰랐네요. 잘 계시다 오세요.’

정희의 짤막한 답신이 온다. 자격지심일까? 정희의 가슴에 남은 앙금이 느껴진다. 며칠 전 정희는 아침식사 중에 신랑 될 사람 가족과 상견례를 할 날짜를 잡자고 했다.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 성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희가 출근한 뒤 아내는 그날 아들 정민도 참석할 것이라는 말을 슬쩍 흘렸다. 우려했던 일이었다.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벌컥 화가 도졌다.

“걔는 안 돼. 내가 걔 얼굴을 어떻게 보란 말이야?”

성재는 외쳤다. 아내는 대꾸하지 않고 눈을 아래로 깔았다. 할 말을 다 했다가는 성재의 화를 더욱 키울 게 뻔해서 참는다는 눈치였다.

“내 심정을 이해 못해? 내가 죽고 싶었다고.”

아내의 그런 태도가 못마땅해서 성재는 더 큰소리를 쳤다. 정민은 성재에게 욕을 퍼부은 사건 뒤 제 회사 근처에 원룸을 잡아 집을 나갔다. 벌써 2개월이 지났다. 그날 아내는 10년 만에야 엄마가 해준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라고 말끝을 흐리며 훌쩍였다. 중학 3학년 2학기 때 영재학교에 합격해 학교 기숙사로 들어간 뒤 대학과 군대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만 9년은 넘고 10년에는 몇 개월이 모자랐다. 성재는 집안이 꽉 찬 듯 훌쩍 커서 돌아온 정민이 자랑스러웠다. 학비를 대야 했다면 신문사를 그만 둔 뒤엔 생활에 타격이 있었을 게 뻔해서 고맙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면 있고 억지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그의 언행에서 성재는 불안을 느꼈다. 나사만 좀 조여주면 이 사회의 훌륭한 재목으로 커나가리라. 부모에게 남은 역할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의 실천이 지금 무망해졌다. 아니, 아비와 자식 간의 관계조차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정민이 술을 먹었을까? 그래서 감정이 과장되어 통제되지 않은 행동이 불거져 나왔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제 결혼인데 아빠가 정민이랑 사이가 나쁘다고 그러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제가 피해보고 싶지 않아요.’

정희는 제 엄마로부터 정민이 상견례에 참석하면 안 된다는 성재의 뜻을 전해 듣고 성재에게 카톡 문자를 보냈다. 문자는 죽도록 애를 써도 성재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들려오는 말 같았다.

‘지금도 그 밤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 내 일생 최대의 치욕이었어.’

성재는 정희를 설득했다. 그러다가 그게 한갓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아무튼 네가 원하면 뭐든 양해하마.’

양해한다는 성재의 답신은 그저 손이 누른 문장에 지나지 않았다. 물러설 수 없다는 목소리가 쿵쿵 가슴을 쳤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성재는 딸의 뜻대로 해주는 거야, 라고 자신에게 억지를 부렸다. 빚을 내서라도 정희의 결혼에 뭔가 보탬을 줄 궁리를 했었는데, 정희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미안하고 서운했었다. 그런 정희가 얄밉고도 착한 딸임을 성재는 되새겼다. 무엇에 대해 판단한다는 건 결국 진실을 왜곡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경험을 통해 성재는 그걸 알고 있었다. 나중에 보면 내가 그때 왜 그랬지, 하는 어처구니없던 일이 한두 번이었던가. 정희에게 따져서는 안 된다는 다짐의 불씨를 꺼뜨리지 말자고 성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느새 강변의 가로등이 꺼졌다. 부루하통하의 수면 아래에 보이던 황홀한 세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검은 물결 속에는 구름과 구름 속을 헤쳐가는 반달이 담겼다. 정희한테서 더는 답신이 오지 않는다. 날 수 있게 될 날을 극구 기다렸다가 보란 듯이 날아갈 것처럼. 언젠가 형호를 위로한답시고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을 별 생각 없이 툭 던졌는데, 그가 지금의 상황에 처한 나를 보고는 뭐라고 말할까? 어디선가 개 짓는 소리가 컹컹, 밤하늘을 조용히 흔든다. 현실이 아닌 것 같은 현실을 그 소리가 성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계속>

글/이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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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 작가는 경향신문 기자 출신으로 민족문화네트워크연구소 부소장 역임했으며 2010년 '계간문예' 등단 이후 북한과 북한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다. 장편소설 '국경'(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선정) 등 작품 다수.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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