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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영화 뷰] '고독하지만 정겨운 작가의 일상'…대작 사이서 빛난 소박한 영화들


입력 2021.12.05 08:54 수정 2021.12.05 08:55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소설가 구보의 하루', 박종환 주연

'싸나희 순정', 정병각 감독의 복귀작

할리우드 대작부터 장르물까지 기대작들이 포진된 가운데 원작을 바탕으로 소소한 감동과 일상의 환기를 불어넣어 줄 저예산 두 편이 관객과 만난다. 류근 시인의 '주인집 아저씨'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 '싸나희 순정'과 박태원 작가의 단편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제목과 설정을 빌려온 '소설가 구보의 일상'이다. 두 영화는 급변한 현대사회에서 자신만의 신념을 고민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작가의 일상을 보여주며 원작의 메시지를 단조롭지만 완성도 있게 빚어냈다.


먼저 '싸나희 순정'은 도시의 고단한 삶에서 탈출해 마가리에 불시착한 시인 유씨(전석호 분)가 동화 작가를 꿈꾸는 엉뚱 발랄한 농부 원보(박명훈 분)와의 얼떨결 동거 이야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외면은 물론 자라온 환경과 성격이 모두 다른 두 남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애정을 갖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무력감에 빠진 유씨는 가방 하나만 가지고 충청도의 한 시골로 떠나오지만, 도시에서 생활하던 그대로 술에 빠진 패턴을 이어간다. 그에게 방 한 칸을 내어준 농부 원보는 이웃을 잘 챙기는 다정한 내면의 소유자다. 이방인 유씨에게 정성스러운 한 끼를 대접하는가 하면 시골의 풍경을 소개하며 그가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처음에는 까칠하고 서먹하게 굴던 유씨는 원보가 이웃을 챙기는 다정한 마음을 보며 흥미를 보이고 점점 그를 닮아간다. 동네 여자 축구 클럽 감독을 짝사랑하는 원보의 실연을 위로해 주고, 원보가 돌보고 있는 아이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유씨는 원보 외에도 이웃들과 친해지며 동네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즐기는 사이가 된다. 그렇게 유씨는 무기력에 치였던 과거의 삶을 잠시 잊고, 시골의 여유로운 풍광에 스며간다.


내면이 충만해지는 일상은 좀처럼 시를 쓰지 못했던 유씨의 영감이 되어준다. 류근 시인의 스토리툰이 원작인만큼 아름다운 시와 원보의 대사들이 마음의 안정과 울림을 준다. 매일 똑같은 하루일지라도 마음가짐에 따라 보이지 않던 일상의 구석을 발견하게 되는 유씨의 변화가 관객의 공감을 산다.


9일 개봉하는 '소설가 구보의 하루'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소설을 대표하는 박태원 작가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배경을 현대로 옮겨와 새롭게 탄생시킨 영화다. '소설가 구보의 하루'는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세태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순문학을 고집하며 글을 쓰는 무명 소설가 구보(박종환 분)의 하루를 담았다.


누군가에게는 똑같은 하루일지라도 구보의 내면은 조용한 충돌을 반복한다. 출판사 선배는 더 이상 컴퓨터가 아닌 원고지에 글을 쓰는 구보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단순히 손글씨를 고집하는 구보의 물리적 행위가 아닌, 시대에 맞게 변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배는 소설보다는 자서전 대필을 제안한다.


오후에 만난 그의 옛 여자친구는 아직도 필름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냐며 느리고 수고스럽게 사는 구보에게 또 한 번 변화를 재촉한다. 옛 여자친구로 인해 참석하게 된 출판계 유명 인사들의 모임에서는 순수문학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다른 작가의 칭찬만 들어야 했다.


자괴감과 무력감으로 어깨가 작아진 구보는 연극을 연출하는 친구에게 연락해 오랜만에 만남을 가진다. 그곳에서 만난 연극배우 지유(김새벽 분)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다. 지유는 구보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그가 썼던 글을 한 구절을 읊으며 그에게 깨달음을 안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구보가 만난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같은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역할을 한다. 반복되지만 자기 목표를 위해 정진해나가는 모습을 누군가는 안쓰러워하고 누군가는 타박을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구보가 글쓰기에 지치고 익숙해진 상태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제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힘을 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날이 어둡게 저물수록 구보의 희망의 빛은 선명해진다.


'싸나희 순정'의 유씨, '소설가 구보의 하루'의 구보는 관객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무력하고 고독한 자신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환기를 하고 존재의 이유와 목표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은 온기를 가져다준다. '싸나희 순정'이 수채화처럼 동화 같은 색채를 지녔다면 '소설가 구보의 하루'는 흑백영화로 진행돼 수묵화의 음영 같은 깊이감을 선사한다. 오늘날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여운과 위안을 줄 영화로 손색없는 작품들이다.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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