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스케줄부터 컨디션·식사까지 관리
뮤지컬계 '샤프롱' 제도, 방송·영화계에도 적용돼야
지난 10일 ‘제6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 역 김시훈·이우진·전강혁·주현준이 신인상을 수상했다. 수상소감 발표 이후 당시 시상자로 나선 전미도는 “빌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이들의 끼를 극찬했다.
160여명이 지원해 1년 동안 3차에 걸친 오디션 끝에 선발된 빌리들의 끼는 이미 치열했던 경쟁률을 뚫고 올라온 것만으로도 증명된다. 그런데 이들이 진짜 ‘빌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따로 있었다. 1차 오디션 직후 1만 3488시간, 562일, 약 18개월 동안 진행된 빌리 훈련 프로그램인 ‘빌리 스쿨’의 트레이닝 과정이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런 ‘혹독한’ 트레이닝은 오히려 아동·청소년 배우들에게 무리 요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빌리 엘리어트’ 제작사인 신시컴퍼니는 출연자 대다수가 초등학생인 상황을 고려해 그에 맞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적용했다.
먼저 학업에는 지장이 가지 않도록 대부분의 연습과 공연은 방과 후에 진행되고, 다소 격한 가사와 안무, 성적인 농담, 욕설 등이 포함되는 장면에선 9~10세 이하의 배우들을 철저히 배제시켰다. 대표적으로 1막 넘버 ‘Solidarity’ 장면(10세 이하), 빌리와 데비가 화장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9세 이하) 등이다. 보호대상이 되는 아역 배우들은 모니터조차 할 수 없는 별도의 공간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빌리 엘리어트’는 샤프롱(chaperon) 제도도 도입됐다. 샤프롱은 과거 젊은 여성이 사교장에 나갈 때 따라가 보살펴주던 사람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현대의 공연계에선 아역배우만 관리하는 전담 스태프를 일컫는다. 미국(브로드웨이)이나 영국(웨스트엔드) 등 선진국에선 아역배우보호법 등에 따라 오래전부터 샤프롱을 두도록 강제하고 있는데, 한국에선 2010년 중반가량부터 도입되기 시작했다.
과거, 그리고 현재에도 드라마·영화 촬영장에서 부모님들이 연습실부터 대기실, 촬영장 곳곳을 졸졸 따라다니며 아이를 관리하는 것을 생각하면 진일보한 변화다. 실제 ‘빌리 엘리어트’에 함께 한 샤프롱은 총 6명이다. 이들은 연습실이나 공연장에 도착하는 아역 배우들을 부모에게서 인계받아 연습과 공연에 동행하고, 안전과 스케줄 관리, 컨디션 체크 등 모든 것을 도맡는다. 학습과 식사까지도 이들의 임무다.
비단 ‘빌리 엘리어트’에서 뿐만 아니라 아역 배우가 출연하는 대형공연들 위주로 샤프롱 제도가 정착되고 있다. 앞서 공연됐던 ‘마틸다’나 ‘보디가드’에서도 샤프롱이 있었다. 샤프롱 제도가 한국에 도입된 것은 사실 자의보단 타의에 의해서였다. 레플리카 공연이 늘면서 외국 스태프들이 샤프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다. 다만 지역 행정당국의 인증을 받은 샤프롱을 두는 해외와 달리 아직 국내에선 공식적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제작사에서 자체적으로 인력을 채용, 운영하는 식이다.
물론 과거보다 나아졌다곤 하나, 여전히 드라마·영화 촬영장에서 아동·청소년이 보호받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히 나온다. 실제로 지난해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이 국회 토론회에서 발표한 아동·청소년 연기자 실태조사에 의하면 조사에 참여 한 총 103명의 아동·청소년 연기자들 중 1일 최장 12시간 촬영을 경험한 이들은 63명으로 60%에 육박했다. 심지어 이들 중 3명은 24시간 이상 촬영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또 욕설 등 인격 모독 경험이 있다는 응답은 26.7%였고, ‘폭력·선정적인 드라마 장면을 촬영한 경험’을 묻는 질문에 “잔혹하거나 폭력적인 장면”(7.77%, 8명) “신체접촉 등 선정적 장면”(1.94%, 2명)을 촬영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 10명을 대상으로 당시 동의 여부를 물었는데 2명은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국회 토론회에서는 아동·청소년 연기자 보호를 위한 ‘전담 감독관 파견제도’가 대안으로 제시됐다. 이는 앞서 공연계에서 정착되고 있는 ‘샤프롱’과 유사한 제도로 볼 수 있다.
한 뮤지컬 제작사 관계자는 “어쨌든 인력을 더 충원하는 만큼 제작비 부분에 있어서 지출이 생기는 것 맞다. 때문에 과거엔 샤프롱을 하면 비용 문제를 먼저 떠올리던 시절도 있었다”라면서도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좋은 공연은 좋은 배우로부터 나온다. 공연계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정착되어야 할 제도”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 이 관계자는 “지금 한국의 문화예술 콘텐츠는 이미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왔다. 여기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선 공연계는 물론이고 드라마나 영화 등 업계에서도 배우들의 인권 개선을 위한 제도들을 도입해 한국 문화예술이 내면적으로 더 탄탄해지고 성숙해져야 할 시기”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