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새로운 세기의 시작에 서구 세계가 들떠 있을 때 동북아시아는 러시아와 일본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중국 동북부와 대한제국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력 경쟁은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일본은 마치 전쟁을 기피하는 것처럼 협상을 이어갔다. 하지만 양국의 협상은 마치 예정되었던 것처럼 결렬되었고, 1904년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에 최후통첩하였다.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리고 2월 11일 전쟁을 총괄 지휘하기 위해 대본영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기습이라는 전쟁 승리의 주요 원칙과 역행하는 듯 보였지만, 당시 일본은 대외적으로 서구식 문명국가를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선전포고 이후 전쟁을 개시한다는 명분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하였다.
하지만 이미 일본과 러시아 간의 전쟁 준비는 선전포고 이전에도 착실히 진행 중이었다. 러시아는 전쟁 계획에 따라 뤼순 항과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요새화하였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동원령을 내리고 군대를 징병하고 있었다. 사세보를 비롯하여 주요 항구에는 수많은 선박이 동원령에 따라 징발되어 병력을 태우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2월 4일 일본 육·해군 수뇌부는 선전포고 이전에 뤼순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결정을 그 다음 날 일본 정부 내각회의에서 보고하였다. 여기서 야마모토 곤베에 일본 해군 대신은 “개전의 호기, 오늘에 있다”라고 상주하면서 계획을 보고하였고, 일본 정부는 이를 채택하면서 전쟁을 결정하였다. 겉으로는 적대 행위 이전에 선전포고라는 중세 서구 기사도 같은 모양새를 갖추고자 했지만, 실상은 그마저도 포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본 육군은 개전 계획에 따라 인천에 상륙하여 신속하게 서울을 점령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사실상 러일전쟁 이전에 일본은 대한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2월 8일 일본 육군 선견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였다. 이들은 신속히 서울에 진입하여 주요 지역을 선점하고 사실상 점령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행위가 절차적으로 허용이 된 것은 한일의정서의 체결 이후였다.
하지만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의정서가 체결된 것은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보름 후인 2월 23일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 영토에 무단으로 군대를 상륙시켜 군사 작전을 개시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 이전 일본의 대한제국 내 적대적 군사 행위는 별다른 흔적도 없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 이전에 외국군이 빈번하게 우리 영토에 상륙하여 서울까지 마음대로 머물던 것이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당시 위정자가 이루어질 수 없는 중립을 외치거나, 친일 혹은 친러 등으로 편을 나누어 다투어 국론이 분열되었기 때문일까?
최소한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당시 위정자들이 생각하는 대한제국이라는 공간 속에는 그들이 지켜야 하는 영토와 국민 그리고 주권을 비롯한 권리라는 것보다 그들 개인이 지향하는 가치와 영달이 더 중요한 의미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