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스크린 데뷔
하다인이 정범식 감독의 영화 '뉴 노멀'로 스크린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최지우, 이유미, 최민호, 표지훈 등 연기력과 스타성을 보유한 배우들 사이에서 유독 낯설었던 이름이다. '뉴 노멀'을 본 관객이라면 안정된 연기력을 바탕으로 하다인이 만들어 낸 여운에 놀라지 않았을까. 하다인은 팍팍한 세상에서 고립된 삶을 살며 하루하루 자신을 죽이고 살려내길 반복하는 공허한 연진의 얼굴을 훌륭히 소화했다.
'뉴 노멀'은 공포가 일상이 되어버린 새로운 시대에 도착한 스릴러 영화다. '기담', '곤지암'의 정범식 감독 신작이다. 하다인이 연기한 연진은 지하 원룸에서 살면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인물이다. 꿈을 뒤로 한 채 편의점에서 마주하는 진상 손님들은 그를 지치게 만든다. 현실에서는 염세적인 얼굴을 하고 있지만 온라인에서는 또 다른 자아로 살아가며 악플도 서슴없이 써내려 간다.
하다인은 시나리오를 읽고 연진에게 청춘의 현실과 연민을 느꼈다. 연진이 화가 많고 거침없이 욕을 내뱉는 이유는 자신이 세상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발악이었다고 해석인 셈이다.
"기본적으로 연진이 인간을 싫어하는 친구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네가 부정적이니까 세상이 널 그렇게 대하는 거야'가 아닌, '세상이 널 이렇게 만든 거야'라는 식으로 접근했어요. 연기하면서 고독하고 아프고 쓸쓸했어요. 연진이가 정말 강하고 드센 친구였다면 죽는 상상은 안 했을 것 같아요. 서툴고 여린 청춘인 거죠. 저 역시 일부는 그런 사람인 것 같고요."
하다인은 '뉴 노멀'보다 정범식 감독이 준비 중이었던 액션 영화에 캐스팅 돼 촬영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제작이 연기되면서, 정범식 감독의 새 시나리오 '뉴 노멀'을 받게 됐다. 사실 그는 '뉴 노멀' 시나리오를 받기 6개월 전 배우로서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한창 진로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 작품이 더 소중하고 절실했다.
정범식 감독은 하다인의 재능과 노력을 알고 있었기에 연진 역도 잘 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에 하다인은 정범식 감독과 함께 현실에 붙어있는 연진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았다. 실제로 역할을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정범식 감독님은 디렉팅의 천재인 것 같아요. 굉장히 디테일 해요. 한 작품, 캐릭터에 임할 때 얼마나 애정을 쏟아야 하는 지를 배웠어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감독님께서 '연진이는 아르바이트를 오래 해서 익숙해져 있을 것 같아. 난 이걸 다큐멘터리 식으로 담아볼 생각이야. 리얼함이 느껴졌으면 좋겠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유튜브나 네이버 등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하는 모습을 찾아보고 포스기 다루는 법도 찾아봤어요. 다이어리에 적어가면서 공부했지만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근처에 어머니와 함께 돌아다녔어요. 공교롭게도 영화 속 편의점과 같은 CU 편의점이 있어 사장님께 제 사정을 말씀드리고 짬짬이 와서 배우고 경험해 볼 수 없느냐고 부탁 했어요. 직접 아르바이트를 해보니 그 때서야 알겠더라고요. 영화처럼 진상을 부리는 손님은 만나지 못했지만 냉소적인 태도들도 경험했고요."
첫 주연작에 임하며 기쁨과 설렘만큼 부담감도 있었다. 연진이의 마음은 100% 이해가 되지만, 실제 자신과는 결이 다르고 해보지 않은 것들 투성이었다. 긴장감에 사로잡혀있던 하다인의 마음을 녹인 건 정범식 감독의 한 마디였다고 한다. 그렇게 하다인은 촬영장으로 연진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촬영 전에 감독님께서 '모두가 네가 잘하기만을 바라고 있어. 그것만 원해. 촬영장에서 웃으면서 지내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주셔서 부담감이 없어졌어요. 정말 큰 팁이더라고요. 제가 소속사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촬영 대기할 때 연진이의 원룸에 앉아있고 편의점에서 지내게 되더라고요. 특히 원룸에 우두커니 앉아있으면 연진이의 꿈이었던 악기가 한켠에 있는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어요. 저 악기를 팔면 돈이 될 텐데 팔지 못하고 구석에 몰아넣은 악기들이 가슴 아프게 와닿았어요. 원룸이니까 계속 그걸 보내야 되잖아요. 그런 감정까지 생각하게 되면서 몰입이 잘 되더라고요."
영화의 엔딩 크레딧은 주인공들이 혼자 밥 먹는 신들이 펼쳐진다. 하다인은 혼자 밥 먹는 신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누군가는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을 뿐인데 비극을 맞이하는 엔딩이 쓸쓸해 보이더라고요. 요즘 사람들과 사람 사이가 쉽게 연결되고 있지만, 자꾸만 외롭잖아요. 연진이도 마찬가지고요."
이 작품은 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폐막작에 선정된 것은 물론, BFI 런던국제영화제, 세계 3대 판타스틱 영화제인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 판타지아국제영화제 등 전 세계 17개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하다인은 첫 작품으로 해외 영화제 초청을 경험한 것이 마냥 벅차다.
"제가 해외 영화제 스크린에 나오는데 신기하고 신비롭더라고요. 해외 영화제는 막연한 구름 같은 꿈이었어요. 다녀오니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요즘 해외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잖아요. 영화로 한국 콘텐츠를 인지시킬 수 있다는 걸 느껴서 책임감도 갖게 됐어요. 또 제 연기를 보고 같이 슬퍼해 주고, 놀라워 해주는 등 감정 교류 자체가 감격스러웠어요. 사실 제가 이전에 해외를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출연한 영화로 해외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정말 기뻤어요."
하다인이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화면 속에 나오는 배우의 눈을 보며 자신도 똑같은 감정을 느낀 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난다. 좋아하는 배우는 메릴 스트립과 공리, 또 스티븐 스필버그, 데이빗 핀처, 정범식 감독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글을 쓰는 걸 좋아해 영화 보다가 너무 좋은 신은 시나리오로 써보며 '나라면 어떻게 연기할까' 상상하고 연습을 하기도 한다. 그런 취향과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내공이 '뉴 노멀'에서 힘을 발휘했다.
"중2 때 영화를 보면서 '나도 배우가 돼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는 단편, 독립 영화 위주로 촬영하면서 좋은 작품에 닿을 수 있길 바라면서 연습하면서 지냈죠. 비로소 만난 첫 작품이 '뉴 노멀'이고 연진이라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연진이는 강하면서도 약하고, 표출하면서도 표출하지 않는, 정말 한국에서 흔하지 않은 캐릭터라는 점에서 정말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 계속 배우를 해가면서도 잊지 못할 캐릭터죠."
하다인은 첫 작품 현대인의 초상이 담긴 '뉴 노멀'이 되도록 많은 관객들에게 닿길 바란다.
"스릴과 재미를 느끼고 집에 들어가시면서 현재의 세상과 주변의 사람들을 한번 바라보셨으면 해요.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 현실이 공포가 되지 않도록 살아보면 어떨까요. 우리 영화는 냉소적이었지만, 그것만을 표현한 영화는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