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합의금 명목 1000만원 빌리고 갚지 않은 혐의 기소…법원 "사기죄 무죄"
법조계 "사기죄, 기망행위 있었다면 성립…얼마나 상대방 속였는지 전반적 고려"
"돌려받지 못할 것 어느 정도 예견했다면…명백하게 속아 돈 건넸다 보기 어려워"
"무죄라도 채무 여전히 존재…대여금청구 또는 손해배상청구 등 민사소송 통해 돌려 받아야"
할머니 합의금 명목으로 지인으로부터 돈을 빌리고 제때 갚지 못했어도 '기망행위'가 없었다면 사기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법조계에선 채무자가 일부 금액을 실제 빌린 용도대로 썼고 피해자도 애초에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예견한 만큼 무죄가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무죄라도 채무는 여전히 존재하는 만큼 대여금청구 또는 손해배상청구 등 민사소송을 통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구지법 형사3단독 강진명 판사는 최근 사기 혐의로 기소된 50대 남성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2018년 10월 A씨는 B씨에게 "할머니가 손자를 키우는데 그 손자가 폭행을 해 합의금이 필요하니 돈을 빌려 달라"며 1000만원을 요구했다. 이에 B씨는 다음 달까지 변제받겠다는 내용의 차용증을 써주고 A씨에게 1000만원을 송금했다. 돈을 갚지 않아 기소된 A씨는 "B씨에게 돈을 빌리기 전 할머니에게 이미 합의금 등으로 500만원을 선지급했으며 1000만원 중 500만원은 선지급 비용에 충당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할머니에게 500만원을 선지급한 사실이 없다면 피고인은 피해자를 속인 것이 된다"며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피고인이 500만원을 피해자에게 고지한 용도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B씨가 A씨에게 속지 않았다는 점도 무죄의 이유가 됐다. 실제 B씨는 수사기관에 "돈을 빌려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돈을 그냥 달라고 했다"며 "솔직히 말하면 1000만원은 차용금은 아니다"고 진술했다.
김희란 변호사(법무법인 리더스)는 "대여한 금전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범죄가 사기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채무불이행과 형사처벌 대상인 사기죄는 객관적으로 구별해 엄격하게 판단된다"며 "사기죄 요건인 기망행위가 있었느냐가 중요한 판단기준이며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얼마나 상대방을 속였는지 전반적으로 고려한다"고 전했다.
이어 "B씨가 'A씨는 돈을 빌려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돈을 그냥 달라고 했고 솔직히 1000만원은 차용금이 아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애초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어느정도 예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기에 명백하게 속아서 돈을 건넸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고 부연했다.
전문영 변호사(법무법인 한일)는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고지한 용도대로 돈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볼 사정이 없다는 점에서 '용도사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돈을 주는 과정에 기망행위 자체가 없었다고 본 것이다"며 "피고인이 무죄라고 하더라도 채무는 여전히 존재하므로, 피해자는 민사절차에서 대여금청구 또는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김소정 변호사(김소정 변호사 법률사무소)는 "사기죄는 허위의 기망행위에 의해 타인을 착오에 빠뜨리고 착오에 빠진 타인이 처분행위를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착오는 반드시 법률행위의 중요부분에 한정된 것은 아니고 동기의 착오로 충분하다"며 "용도사기, 즉 용도를 속이고 돈을 빌린 경우 만약 진정한 용도를 고지하였다면 상대방이 빌려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입증될 경우 사기죄가 성립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기죄에서 기망행위 즉 상대방이 용도를 허위로 고지하였다고 해도 피해자가 속지 않았다면 기망행위로 인해 피해자가 착오에 빠진 것으로 볼 수 없기에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며 "돈을 받지 못한 피해자는 민사 소송을 통해 일방적인 증여가 아닌 돌려받기 위한 목적으로 돈을 빌려주었다는 점을 입증해 반환청구를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