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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전 이전 ‘뒷것’ 김민기 선생의 1977년 그 후 [홍종선의 명장면⑫]


입력 2024.05.14 07:28 수정 2024.05.15 00:42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1977년 인천 피혁공장…점심에 ‘가을 편지’, 새벽엔 학교

노래 ‘상록수’, 노동자 합동결혼식을 위한 김민기의 축가

노래굿 ‘공장의 불빛’(1978)으로 시작된 유신시대의 폐막

다른 사람을 앞과 위에, 자신은 뒤와 아래를 자처한 ‘뒷것’ 김민기 선생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ohys83

이상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 아닌데 왜 늘 마음 한편에 미안함이 자리해 있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청춘의 그때 들국화의 전인권, 장필순과 박학기, 강산에와 노영심, 윤도현 밴드와 동물원, 여행스케치를 그곳에서 만나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김광석, 안치환 등을 보러 그곳에 갔다.


이런 ‘우리의 것’(나중에 보니 독일 원작이 있었으나 셰익스피어의 머나먼 얘기가 아니라 가까운 우리 사는 얘기가 고스란히 담겨서) 뮤지컬도 있구나! 볼 때마다 왠지 다른 듯해 ‘지하철 1호선’을 관람하러 그곳을 찾아 크게 웃었다. 아이와 함께 좋은 생각이 담긴 어린이극도 즐겼다.


그런 일들이 너무 오래되어서 미안한 것일까. 나의 청춘을 위로받고 부모 대신 좋은 얘기를, 부모와 달리 즐겁게 전해 주는 ‘덕’들을 보고도 내 살기 바빠졌다고 발길을 끊어서일까. 덕을 까맣게 잊은, 망덕(忘德)의 몰염치에 마음 밑바닥에 민망함이 자리 잡았던 것일까.


김민기의 인연들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yunys4303

새 발의 피였다. SBS 다큐스페셜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3부작을 보고야 무엇을 잊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 알지 못했던 것인지 깨달았다.


김민기, 평생 묵묵히 해온 일이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보니 3부작까지 만들어지기도 했겠지만. 한 곳에 고여 있지 않고 강물처럼 흐르며 강물 밑바닥부터 수면 위에 사는 이들을 두루 함께한 삶이었기에 ‘저도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자원한 사람이 넘쳐 가까스로 추린 이가 50명 정도라 하니 3부작으로도 부족했을 터이다.


다양한 사람, 많은 이야기가 등장하다 보니 각자의 명장면이 다를 것이다. 누구에게는 설경구와 안내상 황정민을 비롯해 강신일 장현성 오지혜 이황의 이정은 김국희 김대명 등이 들려주는 추억이 신기하고 다른 이에게는 이상우 임진택 채희완 김창남 강헌 이유숙 등 문화예술인의 설명에 귀가 열리고 어떤 이에게는 송창식을 선두로 조영남 전인권 나윤선 박학기 장필순 윤도현 정재일 등 음악인의 얘기가 크게 들리고 또 누구에게는 김민기가 함께했던 공장과 농촌 사람들의 말씀, 힘 모아 야학을 일군 이들이나 첫 제자의 증언이 새롭다. 그 외에도 가슴을 울린 이야기나 장면을 저마다 발견했다고 믿는다.


1977년 즈음의 김민기를 추억해 주신 곽기종 선생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sjh823

필자에게는 1970년대 피혁공장에서 일하신, 현재 세종시에 사시는 곽기종 님의 이야기가 마음 깊이 들어왔다.


“저도 화면에 얼굴 나와서 당당히 하고 싶은데 어떤 트라우마가 남아서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열다섯 살, 제과점에서 잡일하고 있었는데 창고에 들어가다가 폭발이 나서 얼굴 화상에 화상을 입고 손이 심하죠, 4도. 지금 모자이크 처리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제가 이렇게 손에 상처가 있고 그러니까 써주는 데가 없어요. (손님 맞는) 식당도 안 되죠, 들어갈 수가 없죠. 갈 데가 없으니까 피혁(공장) 같은 데는 기피 업종이라고 하죠. 3D, 가장 위험하고 힘들고 더럽고 이런 데. 아무나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기억하기에는 수백 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교대 그런 게 없었어요, 무조건 맞교대 아니면 24시간 해요 혼자. 저는 48시간 일한 적도 있고.”


“피혁 하고 모피를 만지면요, 아예 옷부터 버려요, 제일 먼저. 깨끗할 수가 없어요. 나도 좀 배웠으면 저런 거(화면에는 사무직원들이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업무하는 모습이 보인다) 쉽게 말하면 볼펜으로 글 쓰고 관리를 한다든가, 그런 담당이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했죠. 그런 분들 하고 감히 대화를 나눌 수 없을 만큼 범접할 수 없고 접근을 못 하고, 밥도 같이 안 먹고 그 정도로 심했거든요, 그때 당시에는.”


“어떤 남자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사무직이었습니다. 총무과에 있었고, 우리 관리하는 거죠. 와이셔츠 같은 걸 입었는데 예쁘고 깨끗하고, 얼굴 하얗고 그러니까 ‘왜 저런 분이 이런 데서 일하나?’ 생각했던 분이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이 김민기다, ‘아침 이슬’ 작곡한 김민기.”


“점심시간이 되면 45분 줬어요, 5분이면 후딱 먹고 나가서 어디 창고에서 드러누워 좀 쉬어야 하니까.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점심시간 되면 빙 둘러앉아서 김민기 씨가 기타를 쳐주는 광경을 몇 번(봤어요). ‘가을 편지’를 불렀던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막 30명, 50명, 옆에 공장에서도 몰래 들어와서 구경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거 듣고 박수하고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타 배울 시간도 없었고 만날 죽어라 일만 해야 했으니까. 통기타 문화는 쉽게 말하면 대학생들이나 했죠. MT 가서 하고 하는데 우리는 MT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전혀 그런 틈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고요, 일단 먹고 살아야 하니까.”


“(김민기 씨가) 항상 격려를 많이 해줬죠. 우리가 배우지 못 했잖아요, 자기가 직접 나서서 회사 안에서 이렇게 모아놓고 새벽에 공부하는 거죠. 그분이 직접 했습니다, 직접. 좋은 말씀도 했어요. ‘꿈은 얻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거다’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느끼는 세상을 살아라’. 그 말을 생생히 늘 기억한다는 거죠, 거의 50년이 다 돼가는데. ”


“‘상록수’라는 노래가 있거든요, 그 유명한 ‘상록수’가. 사실은 ‘상록수’가 노동자 부부 결혼식을 위한 축가 곡입니다. 노동자 부부들 (합동결혼식)을 위해 작곡한 겁니다.”


“그 사람들이 지금 거의 작고를 하셨고요, 세상을 떠났고요. 오래 못 사는 것 같아요. 제가 아는 사람도 50도 안 돼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많습니다. 모피가 왜 무섭냐면요, 벤젠 암모니아 황산 염산, 지금 말하면 1급 발암물질이죠, 독극물입니다. 맨손으로 따르는 거예요, 잘못해서 튀기고 화상 입는 건 기본이고요, 그때 당시에 산업용 장갑이 어디 있습니까. (맨손으로) 만질 수밖에 없었어요. 여우 털 하고 밍크를 주로 했거든요.”


1979년 대금연주자 김영동과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공연하는 김민기. 곽기종 님이 말씀하신 예쁘고 깨끗하고 얼굴 하얀 김민기를 짐작할 수 있는 모습 ⓒ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ohys83

1977년 김민기는 인천의 한 피혁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빨갱이 프레임’으로 보면 위장 취업해서 노동자들을 선동한 대단히 악질적 운동권의 행태겠지만. 그의 오랜 친구 이상우 극 연출가가 말하듯 군대를 다녀와 돈을 벌어야 했던, 김민기 자신의 표현으로는 앞서 발표한 ‘아침 이슬’ ‘친구’ ‘길’ ‘아하 누가 그렇게’ 등이 담긴 앨범의 “노래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끔 막혀 있었어요, 일단 먹고 살아야죠”의 이유로 취업했다.


실제로 위장 취업이라면 총무과 사무직이 아니라 생산직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이후 공장에서 보고 느낀 바를 노래로 읊어내 카세트테이프로 제작한 ‘공장의 불빛’ 서두에서 ‘근로자 여러분’이라 말하지 않고 노동자, 민중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렇게 먹고 살려고 들어간 곳에서 김민기가 행한 일들이다. 블루칼라 생산직과는 말도 섞지 않던 화이트칼라가 병존하던 시대, 처참한 환경에서 일하는 동료들에게 짧은 점심시간 노래를 불러 주고 먹고사는 일에 떠밀려 배움에 갈급한 그들에게 밤잠을 줄여 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비록 가진 것 적은 그들이지만 오래도록 푸르기를 바라는 축원을 담아 합동결혼식 축가를 만들었다. 주위 살피지 않고 나만 잘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일상을 살았다.


그의 발길이 닿은 곳에서는 가난해서 배우지 못한 이들을 위해 야학이 열리고, 기초라도 다져서 초등학교에 보내는 게 평등의 기본이라는 생각으로 어린이집이 세워지고, 소비자는 천 원 더 싸게 사고 생산자는 천 원 더 받을 수 있는 직거래 유통구조가 생겼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속담은 들어온 사람의 공은 표가 나지 않지만 나간 사람의 빈 자리는 크다는 뜻인데. 김민기는 든 자리를 알 수 있는, 함께하는 동안 일찌감치 큰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다.


1971년 10월 발매된 김민기의 1집 앨범. 노래 ‘아침이슬’은 B면 두 번째 곡으로 실려 있다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ohys83

이런 마음결을 지닌 사람이 지은 노래라, 세상과 사람을 깊은 마음으로 살피며 살아온 이가 지은 곡이라 민중가요나 노동가요가 아니어도 ‘친구’ ‘아침이슬’ ‘상록수’ ‘이 세상 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을 비롯해 많은 노래가 남녀노소의 마음을 적시고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국민의 입 밖으로 메아리칠 수 있었다.


그 많고도 다양한 일을 아무나 할 수 있지도 아니지만, 그 동기를 알면 더욱 놀랍다. 송창식이 말하듯 운동권이, 많은 국민이 바라본 인물이기는 했으나 자신은 운동권이 아니었다. 많은 친구와 동료가 증언하듯 그는 순수하게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저항의 상징’이 되고 불온한 조직의 우두머리로 오해받았다고 방송에 나왔지만, 만일 목적 의식적으로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저항하려는 사람에게 그렇게 할 힘을 주고 도망가고 싶은 사람에게 그 자리를 지킬 용기를 준 것도 ‘저항의 우두머리’라고 한다면, 그는 우리 시대의 보스(박학기의 표현을 빌려)였다. 어디를 살피고 누구를 아끼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화두를 시(詩)라 할 노래로 던져준 문화적 철학적 ‘어른’이었다.


가수의 꿈이 없고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김민기. 자신의 꿈을 위해 노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담은 노래가 절실할 때, ‘부글부글’ 시대가 그를 부를 때엔 응답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했을 때도 지하에서 나와 노래했다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sjh823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일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채희완을 비롯해 친구 4명과 밤새 일일이 수작업으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이라고 앨범명만 덜렁 붙인 카세트테이프 3천 개는 사람들 마음 사이로 퍼지며 3만 개가 되고 30만 개가 되고 그 이상이 됐다.


어쩜 이렇게 서러운 내 이야기를 잘 아는지 알아주니 위로받고, 테이프 늘어지게 듣고 또 듣다 친구도 힘내라고 복사해서 선물로 주고, 죽어라 일해도 배고파서 못 살겠으니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하라고 길로 나선 YH무역 여자 공원들도 듣고, 그들에게 최루탄 피할 당사 내 준 신민당 당사가 닫히고 야당 당 대표도 가택 구금되고, 국민이야 죽든 말든 수출탑 세우고 재벌 배만 불려주던 대통령은 화가 나서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도 금지하고, 참아도 정도가 있지 선을 넘어도 한참 넘는 유신정권에 분노한 젊은이를 선두로 온 국민이 일어나 독재의 시대를 마감했다.


“감옥 아니라 그보다 더한 처지에 놓이건 말건 달려들어 만들기 시작한 것이 노래굿 ‘공장의 불빛’이었습니다.” (김민기)


중국 베이징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키듯, 순수한 물결은 서로의 몸을 부대며 흐르고 흘러 시대정신을 바로잡았다. 그 덕분으로 군사정권이 아닌 시대에서 살고 있다. 당연히 완성형은 아니나, 적어도 정치·사회적 자유와 민주를 모색하고 추구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의 바탕이 마련됐다.


그 물결의 생성부터 파동의 과정에 힘을 다하고 보탠 많은 이에게, 그중 또렷이 김민기의 행보와 그가 만든 ‘학전’이라는 공간에 은혜를 입은 오늘이다. 그런데 ‘배은’(背恩), 은혜를 잊기도 하고 몰랐던 것도 많음을 다큐멘터리를 보고 깨달았다. 서두에 밝힌 ‘망덕’까지 합해, ‘배은망덕’하고 내가 잘해 일궈진 인생처럼 살고 있었고 그나마 무의식은 그것을 알고 마음 한편에 미안함을 느껴왔나 보다.


뒷짐 쥔 균형으로 고개 숙여 평생을 살아온 ‘뒷것’ 김민기. 쾌유의 기적을 염원하며… ⓒSBS 제공

‘학전’(學田), 배움의 밭이 지난 3월 15일 공연을 끝으로 33년 여정의 닻을 내렸다. 배우들을 기초부터 가르쳐 영화와 드라마 판으로 내보내는 ‘배우 못자리’ 역할만 한 게 아니라, 야학 열고 어린이집 세우던 마음으로 미래의 중심이 될 아이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터전을 자임해 왔던 공간이 사라진다니, 그동안 잘 찾지도 않고선 이제 와 믿기지 않는다.


폐관은 피했다고 하나 이름부터 달라질,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넘어간 그 공간이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배움의 못자리’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 ‘뒷것’을 자처해 다른 이들을 뒤에서 밀어주고 위로 받쳐주며 우리를 ‘앞것’으로 살게 하려 생을 바친 김민기 선생이 1978년 염원했던 일은 오늘 현실이 되었는가.


“이 노래 테이프는 ‘공장의 불빛’ 테이프입니다. 이 나라의 살림을 제일 앞장에 서서 맡고있는 산업 근로자 여러분. 여러분이 떳떳한 이 나라의 주인으로 행세할 때 이 나라의 내일 또한 떳떳할 것입니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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