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인 감독 연출
19일 개봉
꿈을 찾아준 것도, 꿈을 빼앗은 것도 가장 가까웠던 친구라면, 어떤 절망의 시간을 삼켜야 할까. '대치동 스캔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걸 가진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애쓴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절망'이라는 다소 어둡고 부정적인 단어를 썼지만 영화의 톤이 무겁지만은 않다. 국어 강사와 국어 교사, 재일교포 등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언어유희를 살려 영화의 다소 어두울 수 있는 주제를 보는 이들이 잘 소화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영화는 대치동에서 가장 잘나가는 국어 교사 윤임(안소희 분)의 일상으로 시작된다. 윤임은 유명해지고 싶어 대치동 국어 교사가 됐다. 윤임이 짚어주는 문제는 학교 시험에서 나올 확률이 높고, 그의 학생들은 점수들이 쑥쑥 향상돼 인기가 좋다.
그런 그에게 대치동 중학교 국어 교사이자 과거 연인 기행(박상남 분)이 찾아온다. 윤임에게 기행은 반갑지 않은 존재다. 기행은 뇌사 상태인 나은이 산소호흡기를 뗄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한다.
윤임은 그 동안 애써 외면하고 지냈던 과거를 펼친다. 사실 국어 강사가 아닌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꿈, 이 꿈을 갖게 해줬던 친구 나은, 이 꿈을 빼앗아 간 나은, 이후로 한 글자도 쓰지 못했던 윤임의 나날들과 마주한다.
주변인들이 보는 윤임은 당당하고 솔직한 인물이다. 누군가 시비를 걸어도 항상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귀찮아서"라는 말로 별로 내색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간절한 바람이 윤임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손에 들어가 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윤임이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걸 조금 더 빨리 봤다면 나은과 윤임은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었을까.
윤임의 곁에서 열등감을 느끼며 그의 것을 결국 손에 넣었지만 나은도 행복할 수 없었다. 윤임은 나은과 멀어진 이후 한 글자도 쓰지 못했지만 나은은 시간이 멈췄다. 그렇게 오고 싶었던 호수였지만, 허허벌판이라는 생각은 윤임과 나은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국어 강사를 하면서 많은 돈을 모았지만 이사를 가지 않았던 윤임은 내심 기행과 나은을 기다리고 있던 것 아닐까. 기행은 찾아왔고 이제 나은은 찾아올 수 없게 됐다. 나은이 김진향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유작 '영원한 하굣길'은 나은이 세상을 떠나면서 영원하게 됐다. 일련의 사건으로 상대방에게 묻고 싶었던 윤임과 나은의 질문은, 사실 본인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영화를 본 관객 스스로에게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
10년 만에 영화 주연을 맡은 안소희는 윤임 역을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그동안의 연기 경력을 통해 쌓아온 그의 섬세한 감정 표현은 윤임이라는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특히, 무심한 듯하면서도 깊은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는 장면들에서 그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19일 개봉. 러닝타임 109분.